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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석 Aug 24. 2020

임진왜란과 ‘원숭이 기병대’, 그리고 <천조장사전별도>

제목만큼이나 무척 흥미로운 책 《재밌어서 끝까지 읽는 한중일 동물 오디세이》(은행나무, 2020)에는 한중일 전쟁에 얽혀든 동물의 하나로 원숭이 이야기가 나옵니다. 할리우드 영화 《혹성탈출》에 등장하는 진화한 원숭이처럼 임진왜란 때 명나라 군대의 일원으로 전투에서 맹활약했다는 원숭이 부대의 존재. 이게 사실이라면 얼마나 신기한 일인가.     


원숭이 부대가 실제로 존재했다는 진지한 주장을 본격적으로 제기한 건 안대회 성균관대 한문학과 교수입니다. 조선 후기 실학자 이중환(李重煥, 1690~1756)의 《택리지 擇里志》를 번역하던 안대회 교수는 책의 여러 이본(異本)을 비교 조사하는 과정에서 임진왜란 당시에 ‘원숭이 부대’가 실제 전투에서 활약했다는 기록이 거의 빠짐없이 수록됐을 뿐 아니라 내용에도 큰 차이가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택리지》에 등장하는 원숭이 부대에 관한 기록은 다음과 같습니다.     


“(명나라 장수) 양호는 (중략) 중무장한 기병 4,000명과 교란용 원숭이(弄猿기병 수백 마리를 이끌고 가서 소사하 다리 아래 들판이 끝나는 곳에 매복하게 하였다. 왜군이 숲처럼 빽빽한 대오를 이루어 직산으로부터 북상하는 것을 지켜보다가, 거리가 100여 보가 되기 직전에 먼저 교란용 원숭이를 풀어놓았다원숭이는 말을 타고 채찍을 잡고서 말에 채찍을 가해서 적진으로 돌진하였다.     


(왜군들은) 원숭이를 처음으로 보게 되자 사람인 듯하면서도 사람이 아닌지라 모두 의아해하고 괴이하게 여겨 발을 멈추고 쳐다만 보았다적진에 바짝 다가서자 원숭이는 말에서 내려 적진으로 뛰어들었다왜적들은 원숭이를 사로잡거나 때려잡으려 하였으나 원숭이는 몸을 숨기고 도망 다니기를 잘해서 진영을 꿰뚫고 지나갔다.”     


이 장면은 평양전투, 행주산성 전투와 더불어 임진왜란 당시 육상에서 거둔 3대첩의 하나로 꼽히는 ‘소사전투’를 묘사한 대목인데요. 소사(素沙)는 지금의 충남 천안 일대입니다. 소사전투는 1597년의 일이고, 그로부터 150여 년이 흐른 뒤에 이중환은 《택리지》를 저술하면서 ‘팔도론․충청도’ 항목에 이 기록을 남깁니다.    

 

밑줄 친 부분이 알려주는 사실들을 다시 정리해 봅니다. ①전투 초기에 적진을 교란하기 위해 원숭이를 투입했다. ②원숭이가 사람처럼 말을 탈 줄 알았다. ③사람인 것 같았지만 사람이 아니었다. 임진왜란 당시 원숭이 기병대가 실제 전투에 투입돼 쏠쏠한 활약을 했다는 겁니다. 그냥 허무맹랑한 이야기로 치부하기에는 묘사가 꽤 구체적이고 생생하죠? 진짜일까요? 만약 이 기록이 역사적 사실이라면 실로 획기적인 일이 아닐 수 없겠지요?     

이 대목을 그냥 지나치지 못한 안대회 교수는 원숭이 부대에 관한 다른 기록들을 찾아내 논문을 씁니다. <소사전투에서 활약한 원숭이 기병대의 실체>란 제목의 논문은 《역사비평》 2018년 가을 호에 수록됩니다. 궁금해서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서 이번엔 논문을 찾아 읽었습니다. 안대회 교수가 찾아낸 기록 몇 가지가 있더군요. 조선 후기의 실학자 연암 박지원의 <경리 양호 치제문(楊經理鎬致祭文)>. 명나라 장수 양호의 죽음을 애도한 글인데, 여기에 이런 구절이 있답니다.     


弄猿三百 농원 삼백이

一時鞭馬 한꺼번에 말을 달렸지.

狡彼倭奴 저 교활한 왜놈들을

悉殲蹄間 모조리 말굽 아래서 섬멸했네.     


이 짧은 구절에 새로운 사실이 등장합니다. 교란용 원숭이가 ‘3백’이었다고 써놓았습니다. 연암은 대체 뭘 근거로 이렇게 쓴 걸까요. 틀림없이 뭔가를 보고 썼을 텐데요. 하지만 안대회 교수도 그 정확한 근거까지는 확인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다른 자료가 더 없나 여기저기 찾아보다가 원숭이 부대에 관한 또 다른 기록을 발견하지요. 조선 후기의 실학자 이규경(李圭景, 1788~?)의 저서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 이런 내용이 보입니다.     


“왜적을 베어 죽일 때 군사들이 모두 붉은 옷이나 비단옷을 입고 등에는 원숭이 한 마리를 업었다원숭이는 채찍을 휘둘러 말을 내달렸다. (중략) 원숭이가 좌충우돌하니 왜적이 처음 보고서 놀라고 혼란스러워 완전히 패하여 남은 이가 없었으니 원숭이 또한 전공을 세웠다고 하겠다.”     


위에서 본 내용과는 조금 다릅니다. 말을 탄 병사가 등에 원숭이를 업었고, 그 원숭이가 채찍으로 말을 몰았다는 겁니다. 원숭이가 전투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다는 부분은 앞에서 소개한 기록과 일치하고요. 이것 말고도 안대회 교수가 찾아낸 또 다른 기록이 있습니다. 임진왜란 때 무인이자 의병장으로 활약한 조경남(趙慶男, 1570~1641)의 쓴 《난중잡록(亂中雜錄)》은 임진왜란에 관한 한 가장 자세한 기록물로 평가되는데요. 이 책에는 조경남이 사명대사 유정(劉綎, 1544~1610)의 부대를 직접 목격하고 쓴 흥미로운 대목이 나옵니다.   

  

초원(楚猿) 4마리가 있어 말을 타고 다루는 솜씨가 사람과 같았다몸뚱이는 큰 고양이를 닮았다.”     


사람이라면 굳이 ‘사람과 같았다.’고 표현할 까닭이 있었을까요. 게다가 ‘큰 고양이를 닮았다.’고까지 했습니다. 안대회 교수에 따르면, 유정의 부대에 원숭이가 있었다는 기록은 임진왜란 당시 신녕현감으로 전투에도 참여한 손기양(孫起陽, 1559~1617)이란 분의 일기에도 살짝 등장합니다.     


원숭이는 능히 적진으로 돌진할 수 있고…”     


하지만 안대회 교수에게 원숭이 부대가 실제로 있었음을 믿게 해준 결정적인 기록은 따로 있었습니다. 경상북도 안동에 터를 잡고 살아온 풍산김씨 문중에 대대로 전해오는 화첩, 그러니까 그림 모음집 안에서 원숭이 기병대를 묘사한 그림이 있다는 것이었죠. 《세전서화첩(世傳書畫帖)》이라 불리는 이 화첩에는 그림 32점이 실려 있는데요. 이 가운데 <천조장사전별도(天朝將士餞別圖)>란 제목의 그림 2점 가운데 한 점을 주목해보아야 한다는 겁니다.     


풍산김씨 가문에 대대로 전해오는 《세전서화첩》에 수록된 <천조장사전별도>



이 귀중한 화첩이 2012년에 번역 출간됐더군요. 궁금해서 도저히 견딜 수가 있어야지요. 화첩을 구해다가 문제의 그림을 직접 확인해보았습니다. 그림의 내용은 임진왜란이 끝나고 고국으로 돌아가는 명나라 원군을 전송하는 장면을 담고 있습니다. 그림에 붙은 설명을 보면 당시 풍산김씨 문중의 김대현(金大賢, 1553~1602)이란 분이 명나라 부대를 여러모로 살뜰하게 챙긴 모양입니다. 명나라 장수가 조선을 떠나면서 특별히 김대현에게 이런 말을 남겼다고 하지요.     


“지난 두 해 동안 힘든 일을 겪으면서 한결같은 마음으로 돌보아 준 것을 참으로 잊을 수 없다. 지금 서로 이별하게 되니 그동안의 감회가 구름처럼 떠오른다. 귀국의 유명 화가인 김수운(金守雲)이 그린 전별도를 길이 기념할 수 있도록 그대에게 주겠다.”고 하면서 그림을 건네주었다.     


밑줄 친 부분에서 이 그림을 그린 화가가 조선의 김수운이란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화첩의 그림이 그때 그 그림은 아닐 개연성이 크죠. 명색이 조선의 유명 화가가 이 정도 수준의 그림을 그렸으리라곤 생각하기 어려우니까요. 김수운이 그렸다는 원본이 남아 있지 않으니, <천조장사전별도>는 후대의 화가가 상상력을 발휘해 다시 그린 것으로밖엔 볼 수 없습니다.     


<천조장사전별도>에 그려진 포르투갈 출신의 용병 해귀(海鬼)



자,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 볼까요. 이 그림의 왼쪽 아래를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바퀴 달린 수레에 아주 이국적인 외모의 병사 네 명이 타고 있지요. 다른 병사들을 묘사한 것과 비교하면 몸집이 훨씬 큰 데다 피부색은 까무잡잡하고 머리털은 붉은색으로 그려졌습니다. 가운데 삐죽 솟아 나온 병사의 머리 오른쪽 위로 글자가 보이지요? 해귀(海鬼)입니다. 해귀는 포르투갈 출신의 해군 용병입니다.      


임진왜란에 포르투갈 용병이 참전했던 겁니다. 그런데 이게 그냥 웃고 넘어갈 일이 아닌 것이, 바로 이 그림을 근거로 현재 주한 포르투갈 대사관에서 풍산김씨 후손들에게 해마다 연하장을 보낸다지 뭡니까. 제가 과문한 탓인지는 몰라도, 임진왜란에 참전한 다국적 군대를 묘사한 것으로는 이 그림이 유일무이하지 않나 싶어요. 그러니 잘 그리고 못 그리고는 둘째고, 이런 귀중한 그림을 화첩에 묶어 대대로 전해온 정성이 아니었다면 지금 이런 그림을 만날 수 있었을까요.     


<천조장사전별도>에 그려진 원병(猿兵)



이제 해귀들 오른쪽 아래로 시선을 옮기면 짐승의 탈을 쓴 사람인 것도 같고 짐승인 것도 같은 털복숭이 병사들이 보이죠. 생김새를 보면 신체의 모양이나 서 있는 모습은 사람 같이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몸을 잔뜩 뒤덮고 있는 털의 묘사라든가 짐승처럼 주둥이가 뾰족한 머리 모양을 보면 사람과는 또 딴판으로 보이기도 하고요. 그림만 봐선 딱 잘라서 뭐라 단정 짓기가 어렵지요.     


깃발에는 이렇게 씌어 있습니다. ‘원병삼백(猿兵三百)’. 원숭이 병사 3백이라고 적었습니다. 앞에서 본 연암 박지원의 글 내용과 일치하는 숫자입니다. 자, 그렇다면 이걸 실제 원숭이로 볼 것이냐, 아니면 단지 변장을 한 사람으로 볼 것이냐, 헷갈릴 수밖에 없습니다. 《세전서화첩》을 연구해서 2012년에 번역본을 낸 두 연구자는 이들을 “여진족 출신 투항자들로 구성된 군인들”이라고 소개했습니다.     


그런데 최근에 저는 원숭이 부대를 구체적으로 언급한 또 하나의 책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의 정은주 연구원이 쓴 《조선시대 사행기록화》(사회평론, 2012)입니다. 이 분야에서 국내 최고 전문가로 꼽히는 저자는 <천조장사전별도>에 등장하는 원숭이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화면 속 원병(猿兵)은 전략적으로 훈련시킨 원숭이를 적진에 침투시켜 말고삐를 풀어 적을 교란하는 데 이용하였던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의 용병술을 엿볼 수 있어 주목된다.”     


정은주 박사도 원병(猿兵)을 ‘여진족 투항자인 달자(㺚子)’로 간주한 기존 연구자들의 주장을 당연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책에서 분명하게 원숭이 부대의 실체를 인정하고 있죠. 그러면서 조선 후기에 사신단의 일원으로 청나라에 다녀온 이항억(李恒億, 1808~)이 《연행일기 燕行日記》에서 북경 거리에서 본 잡희(雜戲) 공연 장면을 묘사한 내용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한 작은 원숭이가 호복(胡服)을 입고 버티고 서기를 마치 5~6세 아이같이 했는데, 놋줄을 잡거나 나무를 오르며 춤을 추어 온갖 모양을 지어 보였다. 양을 채찍질하여 빨리 달리게 하자 원숭이는 즉시 양을 올라타고 한 편 달리며 한 편 활을 쏘았다. (…) 개가 보습을 짊어지니 원숭이는 또 쟁깃술을 잡고 밭 가는 모양을 해서 그 밭이랑을 남쪽으로 내기도 하고 동쪽으로 내기도 했다.”     


실제 원숭이라고 생각한 것이 아니라면 굳이 이런 내용을 소개할 까닭이 없었겠죠. 알면 알수록 흥미롭기 이를 데 없는 주제입니다. 조선시대 학자들도 마찬가지로 흥미를 느꼈겠죠. 조선 후기의 실학자 이익(李瀷, 1681~1763)의 《성호사설 星湖僿說》과 이긍익(李肯翊, 1736~1806)의 《연려실기술 燃藜室記述》에도 관련 기록이 보입니다.     


“유정(劉綎)이 동정(東征)할 때 수십 종류의 해귀(海鬼)를 이끌고 나왔다고 한다. 그들은 남번(南蕃. 남방의 미개(未開)한 나라. 촉중(蜀中)의 땅임)에서 나왔다는데, 얼굴이 새까만 것이 귀신처럼 생겼고 바다 밑으로 헤엄을 잘 쳤으며, 그중에 키가 거의 두 길 정도나 되는 거인(巨人)이 수레를 타고 오기도 하였고 또 두 마리 원숭이가 궁시(弓矢)를 허리에 차고 앞장서서 말을 몰아 적진(賊陣)으로 들어가 적의 말고삐를 풀었다는 것이다.”

- 《성호사설》 제23권 경사문(經史門)     


○ 군중에 지개삼(之介三)이란 더러운 오랑캐의 종족이라는 자가 있었는데, 키가 크고 체구가 큰 것이 보통 사람보다 10배나 되었다. 해귀(海鬼)가 넷인데 까만 눈에 붉은 머리털이 가는 털과 같았다. 초지방 원숭이가 네 마리인데말을 타고 활을 사용함이 사람 같았다. 그 밖에 소ㆍ양ㆍ돼지와 잡물도 가져오지 않은 것이 없었다.     

○ 또 두 마리의 원숭이에게 활과 화살을 차고 말을 타고서 앞에서 인도하게 하였는데원숭이는 적진에 들어가서 말의 고삐를 풀 수도 있었다.

- 《연려실기술》 제17권 선조조 고사본말(宣朝朝故事本末)      


물론 이런 기록들을 더 찾아내 본들 원숭이 부대의 실체를 규명하는 데는 일정한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죠. 직접 본 사람이 쓴 게 아닌 다음에야 전해 들은 이야기에 지나지 않을 테니까요. 논문을 쓴 안대회 교수는 원숭이 기병대에 관한 해석이 크게 네 가지로 이뤄지고 있다고 소개합니다.     


①원숭이처럼 민첩한 병사

②털이 많이 난 중국 주변 국가의 소수민족 병사

③원숭이의 탈을 써서 변장한 병사

④원기(猿騎), 곧 마상재(馬上才)     


영화 《혹성탈출》의 한 장면

  


자, 여기까지 읽고 난 여러분은 위의 보기 넷 가운데 어느 쪽에 더 가깝다고 보시나요. 사실 이 논문은 충분히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내용임에도 당시 언론들은 별로 주목하지 않았습니다. 언뜻 봐선 믿거나 말거나 한 이야기처럼 들릴 수도 있으니까요. 그럼 제 생각은 어떠냐고요? 논문에 화첩에 이런저런 기록들을 찾아 읽은 저로서는 원숭이 부대가 실재했다는 쪽을 조금 더 믿어보고 싶습니다.      


이런 흥미로운 역사의 한 장면이 실제 있었던 일이라고 한다면 훗날 대하역사극의 한 대목에서 원숭이 기병대가 활약하는 모습을 볼 수 있게 될 날이 오지 않을까요. 역사라는 건 분명 흘러간 과거에 불과한 것처럼 보이지만 수백 년이 흐른 지금 우리를 무한한 상상력의 세계로 안내하곤 한답니다.          



※ 이 글은 아트렉처(artlecture.com)에 먼저 소개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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