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주부대디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씨네가족 Jul 23. 2020

백수 사위가 처갓집에서 어깨 당당히 펴고 사는 법

수컷 사자는 사냥을 하지 않는다.

용맹한 이미지와는 달리 수컷 사자는 사냥을 하지 않는다. 하루 중 거의 대부분의 시간인 20시간을 그늘에서 쉬면서 보낸다. 사냥은 암컷이 담당한다. 이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이 꽤 있다. 당연히 힘이 센 수컷이 사냥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수컷 사자가 사냥을 하지 않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그중에 제일 큰 이유는 새끼들을 무리에서 지키기 위해서다. 그래서 주로 사냥은 암컷 사자가 하고 수컷은 무리를 지킨다. 그렇다고 수컷 사자가 전혀 사냥을 하지 않는 건 아니다. 암사자들이 감당할 수 없는 강적이 나타났을 때나 암사자들이 사냥 도중 하이에나 무리를 만났을 경우에는 수컷 사자가 나타난다. 


이런 경우는 흔치 않으니, 내가 볼 때는 수컷 사자와 백수는 참 유사한 모습을 지니고 있다. 그렇다고 내가 "장모님 사실 수컷 사자도 사냥을 잘 안 해요. 암컷이 사냥합니다." 이런 이야기를 꺼낼 순 없다. 그렇다. 무슨 이야기라도 쉽게 꺼낼 수 없는 나는 백수 사위다.


이것저것 하는 일이 있기는 하지만, 한마디로 딱 이거다 정의해서 하는 일은 없다. 그래서 누구에게 분명히 소개하기에 애매한 부분이 있다. 특히나 어른들의 세상에서 나를 소개하기에는 뭔가 찜찜한 구석이 그분들에게 있는 듯하다.


직업적으로는 장모님께도 우리 부모님께도 뭔가 당당히 설명하기가 어렵다. 우리 부모님은 우리 집의 경제를 거의 지탱시켜주고 있는 나의 아내 눈치를 보고 계시며, 나는 장모님의 눈치를 본다. 그렇다고 내가 어깨를 당당히 펴지 못하는 건 전혀 아니다. 나는 언제나 당당하다.


물론, 아내가 우리 집의 경제의 많은 부분을 감당하니, 장모님께 인심 쓰며 드리는 용돈에도 뭔가 미안함이 묻어져 나온다. 그런데 다행인 것은 장모님도 아이들을 키우면서 일도 하셨기 때문에, 지금 나의 입장이 더 쉽지 않다는 걸 알고 계신다. 


가끔 내가 일하러 나갈 때 아이들을 장모님께 맡기는데, 자주 맡기지 못하는 이유는 이 일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장모님도 가끔씩 맡아주시지만, 길게 맡길 경우에는 두둑한 용돈 없이는 불가능하다. 


결국 내가 어깨를 당당히 펼 수 있는 이유는, 

아내가 밖에서 열심히 경제적 활동을 해서 우리 집의 경제를 책임질 수 있도록 보이지 않는 곳에서 힘들지만 어려운 일을 묵묵히 해내고 있기 때문이다. 이건 내 생각이 아니고 장모님의 말을 빌려왔다.


아주 예전에는 바깥일이 더 중요하고 집안일과 아이들 케어는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시간이 지나서는 집안일과 아이들 케어가 더 중요한 일이라고 바뀌는 시절이 있었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 보니, 더 중요하고 덜 중요하고의 문제가 아닌 듯하다.


그냥, 주어진 일을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서 해낼 수 있는 힘의 문제로 귀결되는 듯하다.

사회생활은 사회생활 나름의 유익과 어려움이 있다.

집안과 아이들 케어하는 것 역시 나름의 유익과 어려움이 있다.

이 둘은 비교하기에는 너무나 다른 영역이어서 비교 자체가 사실 불가능하다.


주어진 환경에서 맡겨진 일을 묵묵히 잘 해낼 수 있다면,

그것이 그 사람의 신분과 위치에 상관없이 어깨를 당당히 펼 수 있는 일 아닐까?


백수 사위가 장모님 앞에서 당당할 수 있는 이유는,

최소한 나에게 맡겨진 이 일에 대해서 자부심을 가지고 의미를 찾으면서 잘 감당해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마음과 경험으로 볼 수 있는 이 일의 영역을

나의 장모님은 알고 계신다.

그래서 비록 다른 사람들에게 떳떳하게 자랑은 못할지라도,

속으로 내 딸을 가장 사랑하고 아껴주고, 아내를 위해서 어려운 집안일과 아이들 케어까지 잘해주는 것에 고마워하는지도 모르겠다.


눈에 보이는 것보다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언제나 더 중요하고 가치 있는 일이니깐.

그 가치를 알아보는 장모님 덕에 너무 어깨를 당당히 펴고 살고 있는 걸까?


매거진의 이전글 남성들이여 우리도 아이들을 데려다 놓고 브런치 먹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