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 쓰인 언어를 말할 수 있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왜냐하면 말로 한 언어와 글로 쓴 언어, 듣는 언어와 읽는 언어 사이에는 상당한 간격이 있기 때문이다. 전자는 대개 일시적인 것으로 하나의 소리, 하나의 혀 또는 하나의 방언에 지나지 않으며 우리는 그것을 동물처럼 무의식적으로 우리의 어머니로부터 배운다. 후자는 전자가 성숙되고 경험이 쌓여서 이루어진 말이다. 전자가 '어머니 말'이라면 후자는 '아버지 말'이며 신중하고 선택된 표현이다. 이 표현은 단순히 귀로 듣기에는 너무 깊은 의미를 가졌으며, 이것을 입으로 말하려면 다시 한번 태어나야 하는 것이다.
<월든, 헨리 데이빗 소로우 p155중에서>
나는 수십 명, 수백 명 혹은 수천 명 앞에서 이야기하는 것이 전혀 어렵지 않다. 수천 명 앞에서 강연을 해본 적은 없지만, 수백 명 앞에서는 많이 해봤다. 그러기 위해서 기본적인 자료를 만들고 많은 사람들 앞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이어 나간다. 대부분의 강연장에서는 그 청중이 누가 왔으며, 그 분위기가 어떠한지가 중요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청중이 나보다 내가 강연하는 주제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할 때 그 강연은 더욱 힘을 발휘한다. 즉 쉽게 강연할 수 있고 크게 준비하지 않고도 그 시간을 즐겁고도 유쾌하게 보낼 수 있다.
나에게 있어서 강연은 쉬웠는데, 글쓰기가 더 어려운 이유가 무엇인지 헨리 데이빗 소로우 월든 책을 읽으면서 명쾌해졌다. 역시 강연은 쉬운 일이었으며 가장 어렵고 힘든 일은 글쓰기였다. 그는 언어에 대해서 4가지 차이가 있으며 그 간격의 크기 중에서 글로 쓴 언어가 가장 어렵고도 높은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표현한다. 물론 그 글이 가치 있는 글이어야 하는 당위성은 내포되어 있어야 한다.
말은 쉽다. 말을 할 때는 단어 선택에 있어서 큰 고민을 하지 않는다. 그저 입에서 나오는 대로 이야기되는 게 대부분이다. 어떤 단어를 선택해야 할지 고민하면서 말하기는 원천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글쓰기는 완전히 다르다. 단어 선택을 해야 하고, 한번 쓴 문장을 다시 고쳐쓰기도 해야 하며, 한 문장을 전부 다시 쓰기도 하고 전체 글 자체를 다 지워버리기도 한다.
글쓰기에는 퇴고라는 꽤 괴로운 작업이 존재하는데, 사실 내가 브런치에 올리는 글들은 퇴고를 거의 하지 않는다. 일단 이곳에 쓰인 모든 글은 과감 없이 표현된 초안들이다. 혹 나중에 책으로 출간되면 그때는 퇴고를 하여야겠지만, 사실 나는 상당히 게으른 성격이라 반드시 해야 하는 중요한 퇴고를 저 멀리 일단 미뤄놨다. 그래야지 많은 글을 쓸 수 있고 정제되지 않은 글들 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어떠함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다.
헤리 데이빗 소로우의 표현에서 보듯이 글쓰기에는 신중하고 선택된 표현이 존재한다. 일단 선택을 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표현을 알아야 한다. 다양한 단어의 원래 뜻도 정확히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많은 양의 책을 읽는 방법밖에는 없다. 즉 글쓰기를 잘하기 위해서는 다독이 필수다. 그런데 다독에 있어서도 자기가 좋아하는 분야만 읽어서는 그 글이 가지는 힘이 약할 수밖에 없다. 그 어떤 유명한 소설도, 고전들도 보면 한 가지 측면만 있지 않다. 작가지만 그의 세계관과 다양한 영역에서의 독서가 있었음을 쉽게 유추해 볼 수 있다.
마지막으로 작가가 되고 싶은 이들에게 심금을 울리는 글로 강연보다 글쓰기가 어려운 이유에 대한 짧은 글을 마치고자 한다.
연설가는 그때그때의 감흥에 몸을 맡겨 자기 앞에 있는 군중, 즉 자기 연설을 '들을'수 있는 사람들에게 말한다. 그러나 작가는 자신의 평온한 생활이 글을 쓰는 동기가 되며, 연설가를 감흥 시킬 수 있는 그런 사건과 군중을 만나면 오히려 정신이 산란해진다.
<월든, 헨리 데이빗 소로우 p1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