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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씨네가족 Nov 20. 2020

집에 사무실을 차렸다.

코로나가 길어지면서 집에 있는 시간이 상당히 많아졌다. 커피숍도 자주 갔었는데 이제는 마스크 쓰고 커피숍에서 일하는 것도 그다지 내키지 않아서 대부분 집에서 시간을 보낸다. 원래는 거실에 데스크톱 PC가 있었고 가끔 데스크톱 PC도 사용했지만 나의 작업 공간은 주로 주방에 있는 식탁이었다. 뭐 사실 딱히 말해서 나의 작업 공간이 없었다. 주방 반대편에 아주 작은 공간이 하나 있었는데 그곳은 책과 함께 소파가 뉘어져 있었다. 그런데 가끔 손님들이 오면 거실에 있는 소파와 이곳에 있는 소파와의 경계가 애매해서 손님들이 어디로 가야 할지 헤매는 모습을 봤다. 그래서 뭔가 변화가 필요했고 소파를 모두 거실로 옮기기로 했다. 그러면서 내 작업공간도 이곳에 만들면 어떨까? 하는 아내의 제안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거실에 있는 공간이지만, 이곳은 오직 나를 위한 공간이다. 다섯 식구가 한 집에서 살다 보면 서로의 공간이 뒤섞이기 마련이다. 함께 하는 게 어려운 순간이 온다는 건 서로의 공간이 뒤섞일 때다. 각자만의 공간이 남겨져 있으면서 나머지 공간을 서로 공유하고 함께할 때 진정으로 함께 사는 것의 즐거움을 맛볼 수 있다. 


 함께 살지만 함께 사는 것이 너무 힘들어진다는 건, 각자의 공간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고 서로의 공간이 뒤섞여 이 물건은 누구 것인지 구분을 할 수가 없고 내 것, 네 것에 대한 구별이 사라질 때 우리는 힘겨워질 수 있다. 특히 동양권의 사람들 중에서 한국사람들은 '우리'라는 말을 참으로 좋아하는데, 이 '우리'라는 말속에 숨겨진 이중성을 파악하지 못한다면 그 좋은 '우리'가 아주 나쁜 '우리'로 변할 수 있다. '우리'라는 단어 자체는 좋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 같지만 그것이 지나치면 오히려 독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어차피 한국사람은 그 민족성을 완전히 버릴 순 없기 때문에 '우리', '공동체', '타인의 시선'등을 많이 의식한다. 나 역시 거기에서 자유롭지 못한 그저 평범한 한국인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의도적으로 '개인', '나', ' 자기만의 성찰'등이 중요한 서양의 시각을 많이 배우려고 노력한다. 그렇게 탄생한 거실의 내 작업공간은 아니었지만, 탄생하고 보니 상당히 만족스럽다. 여기저기 뒤섞여 있어서 뭔가 희생만 해야 할 것 같은 전형적인 한국의 부모 모습을 나도 그대로 담습 하고 있지 않나 생각이 들었다.


 내 공간이 없고 그저 아이들을 위한 공간으로 전락해버린 우리들의 안타까운 육아의 현장, 양육의 현장이 좋아 보이진 않는다. 분명 아이들에게도 좋은 교육은 되지 못할 거라 믿는다. 나만의 공간이 있을 때, 부모만의 공간이 있을 때, 부모들의 시간이 존재할 때, 아이들에게도 그들의 공간이 주어지고, 그들의 공간이 생기고, 그들의 시간이 생긴 다는 걸 알려줄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거실의 약간 귀퉁이에 있지만 현관문을 열면 바로 보이는 멋진 공간에 나의 작업공간이 생겼다는 건 너무나도 뿌듯하고 기분 좋은 일이다. 그렇게 만들어진 공간에서 처음 쓰는 글이라 뭔가 두서없는 듯 하지만 기분은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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