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여백 빈센트 반 고흐
의욕적으로 일하려면 실수를 두려워해서는 안된다. 사람들은 흔히 잘못을 저지르지 않으면 훌륭하게 될 거라고 하지. 하지만 그건 착각이다. 너도 그런 생각은 착각이라고 말했잖아. 그들은 그런 식으로 자신의 침체와 평범함을 숨기려고 한다.
사람을 바보처럼 노려보는 텅 빈 캔버스를 마주할 때면, 그 위에 무엇이든 그려야 한다. 너는 텅 빈 캔버스가 사람을 얼마나 무력하게 만드는지 모를 것이다. 비어 있는 캔버스의 응시, 그것은 화가에게 "넌 아무것도 할 수 없어"라고 말하는 것 같다. 캔버스의 백치 같은 마법에 홀린 화가들은 결국 바보가 되어버리지. 많은 화가들은 텅 빈 캔버스 앞에 서면 두려움을 느낀다. 반면에 텅 빈 캔버스는 "넌 할 수 없어"라는 마법을 깨부수는 열정적이고 진지한 화가를 두려워한다.
캔버스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삶도 무한하게 비어 있는 여백, 우리를 낙심케 하며 가슴을 찢어놓을 듯 텅 빈 여백을 우리 앞으로 돌려놓는다. 그것도 영원히! 텅 빈 캔버스 위에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삶이 우리 앞에 제시하는 여백에는 아무것도 나타나지 않는다. 삶이 아무리 공허하고 보잘것없어 보이더라도, 아무리 무의미해 보이더라도, 확신과 힘과 열정을 가진 사람은 진리를 알고 있어서 쉽게 패배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는 난관에 맞서고, 일을 하고, 앞으로 나아간다. 간단히 말해, 그는 저항하면서 앞으로 나아간다.
1884년 10월(테오에게 쓴 편지)
빈센트 반 고흐, 영혼의 편지 P115, 예담
어릴 적부터 나는 그림을 잘 그리고 싶었다. 그리고 그림을 잘 그리는 친구들이 부러웠다. 그리고 특별히 미술을 하는 여자는 그냥 매력적으로 보였다. 아마도 나의 아내와 결혼 한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다. 지금도 나의 아내가 그림을 그리는 모습을 보면 그냥 신기하고 매력적이고 아름다워 보인다. 나에게 없는 어떤 것을 가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림을 전문적으로 그리는 화가의 삶을 조금 들여다보니 마냥 아름답거나 멋있기만 한 게 아니었다. 그들은 치열하게 텅 빈 캔버스와 싸움을 하는 이들이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해낸다는 것. 어쩌면 신의 영역에 가장 과감하게 도전할 수 있는 영역이기도 하고 신이 인간에게 허락한 가장 매력적인 직업이기도 하다.
나는 그림을 그릴 순 없지만 글은 쓸 수 있다. 그런데 글이라는 것도 그림과 상당히 유사하다. 빈 백지에 나의 생각과 경험을 적절한 단어와 문장들을 사용해서 표현해낸다. 그림을 그리는데 중요한 건 그림을 그리는 기술과 그의 철학, 경험, 영감 등이 있다면 글도 이와 유사하다.
글을 쓰는 데 있어서 적절한 문장을 구사하고 잘 표현하는 게 어떤 글의 기술이다. 그런데 이 기술도 갈고닦아야 하지만 이것보다 더 중요한 건 역시 글 속에 담긴 그의 인생과 철학과 삶에 대한 진지한 질문과 고통과 기쁨 등이 적절하게 섞여 있는지가 중요하다.
어떤 글이든 써낼 수 있고 무엇이든 자신의 생각을 표현할 순 있지만 자신에게 없는 걸 글로 쓸 순 없다. 그러한 글은 이미 죽은 글이기 때문에 그저 텍스트를 어떤 백지나 인터넷 공간에 글을 타이핑한 것에 불과하다.
그래서 때로는 이곳 브런치에서 제목을 입력하세요!라는 문구가 상당히 도전적으로 보이기도 하고 그 밑에 이어지는 백지가 두려움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그렇지만 반 고흐가 그러했던 것처럼 일단 무언가 써야 한다. 쓰는 게 먼저다. 그러다 보면 엉켜있던 생각들이 글로 표현이 되고 나의 경험과 철학들이 글에 버무려져 살아 있는 글로 변화된다. 물론 때로는 의미 없고 공허한 글쓰기로 남겨지기도 한다. 이런 걸 아마도 실수라고 하는 거겠지?
나는 이전에 실수를 많이 두려워했다. 그래서 완벽하고자 노력을 하니 아무것도 안 하게 되는 상태도 많이 되고 도중에 포기도 많이 하게 되었다. 이제는 그런 삶에서 조금 변화하고자 글을 쓰기 시작했는지도 모르겠다. 여전히 삶은 난관의 난관을 거듭하지만 그 사이에서 나는 그 난관들을 어떻게 극복했는지 글로 남기기도 하고 난관 속에서 받은 상처들을 글로 풀어내기도 한다.
화가가 빈 백지에서의 싸움에서 이겨서 의미 있는 그림을 이 세상에 남기고 그의 영혼이 그림에서 여전히 살아 숨 쉬듯이 작가는 빈 종이와의 싸움에서 이겨서 누군가에게 여전히 삶은 살아갈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다고 조심스럽게 흔적을 남기고 사라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