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살, 첫 회사를 퇴사한 후, 나는 많이 방황했다.
퇴사를 결정할 땐 그 상황을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만 너무 강해서 그다음 단계에 대한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다.
그럴싸한 계획이 없었던 탓인지 나는 목표 없이 계속 종종거리기만 했다.
뭘 하고 싶은지, 어디서부터 뭘 어떻게 해야 할지 감조차 오지 않았다. 그래서 그 당시에 할 수 있는 선택들을 하나둘씩 하기시작했는데, 그마저도 잘 되지 않았다.
약 3년 동안 계속 지지부진한 상태에서 갈피를 못 잡고 같은 자리만 맴돌다 보니 자존감이 점점 떨어졌다. 타인의 행복에 온전히 축하하지 못하고 남들과 나를 끊임없이 비교하며 자격지심만 가득했다.
왜 나는 보통 사람처럼 살지 못할까.
왜 견디지 못하고 쉽게 흔들리며 제 앞가림조차 할 줄 모르는 사람일까.
모나고 못났던 시절의 나를 도저히 사랑할 수 없었다. 1인분의 삶조차 버거워하는 나에게 연민을 느끼면서도 그런 나약함에 화가 나기도 했다.
나의 분노는 시간이 지나면서 불안함으로 자랐다.
하루가 다르게 자라난 불안을 두려워하며 잠에 들고 깨기를 반복했다.
스물다섯이면, 스물여섯이면, 스물일곱이면…
사회에서 자리를 잡아야 하고, 1인분의 삶을 살아야 하고 돈도 어느 정도 모아야 하고 힘든 건 어느 정도 견디고 넘어갈 줄 알아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분명 내 주변 사람들은 그렇게 살고 있는 것 같아 보였다. 힘들다고 하면서도 각자의 자리에서 꾸준히 커리어를 쌓고 있는 친구들이 멋있었고 부러웠다.
그런 친구들에 비해 여전히 볼품없는 나는 나의 안부를 묻는 질문조차 불편해했고 그럴싸한 구실을 만들어 상황을 피하기 바빴다.
자기 연민과 자기혐오에 빠져 살던 내가 달라지기 시작한 건 의외의 만남에서부터였다.
전 직장이 학원이었던 나는 스무 살이 된 제자들과 약속을 잡게 되었는데. 흔쾌히 오케이 하는 척했으면서 사실 나는 그 만남을 조금 피하고 싶었다.
퇴사 후에 괜찮은 어른의 삶을 살고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그러지 못한 나 자신이 부끄러웠기 때문이었다. 민망함을 숨기지 못하고 내 안부를 털어놨을 때 제자들의 반응은 의외로 심플했다.
“선생님 어리실 거라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더 어리시네요.”
“선생님은 잘하시는 거 많으니까 어떤 거 하셔도 잘하실 것 같은데.”
“지금도 늦은 나이 아니잖아요.”
분명 그간 나를 지나온 위로와 별 다르지 않은 말이었다.
그동안의 위로는 너무 무겁게만 느껴졌었는데 제자들의 심플한 말들은 딱히 나를 위로하기 위한 말이 아닌 것 같았다.
어떠한 의도도 없이 반사적으로 나온 듯한 말이 묘하게 와닿았다.
갓 스무 살이 된 아이들 앞에서 ‘스물일곱이면 어린 나이’라는 말이 마냥 웃기기도 했고 뭔가 설명할 수 없는 싱숭생숭한 마음이 피어났다.
진짜로 내가 뭐든 할 수 있을 거라 믿는 확신에 찬 눈망울이 감동적이었던 것 같기도 하고.
‘나를 너무 좋아하네.’라는 말로 너스레를 떨었고 애들은 질색했지만, 그 순간만큼은 자격지심 없이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 만남이 있고 머지않아 나는 새로운 회사에 입사했다.꿈꾸던 직종은 아니었지만, 다시 1인분의 삶을 시작할 수 있다는 사실이 기뻤다.
그리고 6개월 후 나는 회사에서 원하는 직무로 전환할 수 있게 되었고 능력을 인정받아 승진도 했으며 2번의 연봉 협상까지 성공했다.
끝나지 않을 것 같던 시간도 결국 끝이 났다.
나를 진창에서 끌어내리는 것도 나지만 그 시간을 이길 수 있는 것도 나였다.
언제고 몇 번이고 불안을 마주할 때마다 나는 불안해할 테지만, 찰나의 스러짐이 영원한 실패가 아니라는 것을 이제는 안다.
불안함에 속지 않고 현재를 견디는 힘.
20대 후반의 불안은 그렇게 영글어가는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