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약본 10개보다는 좋은 책 1권
방금 글쓰기 전에 잠깐 인스타를 보는 사이 앱 광고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Blinkist 라는 외국 앱인데 경제, 심리, 역사, 사업 등 다양한 분야의 원서 혹은 강연의 15분 요약본을 제공한다. 얄팍한 지적 호기심이 있는 사람으로서 자연스럽게 광고를 누르고 앱을 다운받았다. 앱을 실행해보니 콘텐츠 앱이 으레 그렇듯 설문조사를 시켰다. 넷플릭스처럼 관심 장르를 고르고 그 안에서 몇 가지 콘텐츠를 띄워준 다음 UP or Down으로 한번 더 구체적인 관심사를 파악하는 식이었다.
설문조사 과정은 재미있고 설렜다. 특히 책 표지 이미지와 1줄 요약을 보고 UP or Down을 클릭할 때가 가장 좋았다. 마치 서점을 한바퀴 둘러볼 때와 비슷한 기분이었달까. 서점에서도 항상 들어서서 한바퀴 둘러보면서 예쁜 표지들 구경할 때가 제일 재밌으니까. 위에 언급한대로 나는 역사, 심리, 경제, 사업 등 다양한 분야의 콘텐츠에 UP을 눌렀다. 그리고 자기계발 및 동기부여 콘텐츠는 Down을 눌렀다. 그러면서 아주 잠깐 동안 희열을 느꼈다. 진짜 실력을 길러주는 학문적 지식에만 관심이 있지만 나약한 마음을 쿡 찔러 장사하는 동기부여 콘텐츠에는 관심이 없는 멋진 사람이 된 것만 같았다.
설문조사를 마치고 나니 결제 유도 창이 띄워졌다. 12개월에 99,000원 / 128,000원 (비싼 플랜은 AI 기능 뭔가가 있다는 것 같은데 제대로 설명이 안되었더라). 앞선 설렘은 온데간데없고 냉정해진 소비자로 돌아와버렸다. 자연스럽게 이런저런 계산을 해보았다. 99,000원이라는 금액의 기회비용 중 가장 설득력 있었던 비교대상은 책 5~6권 이었다. 요약본 15분짜리를 지하철 오가며 일주일에 5번만 들어도 52주면 160권인데, Blinkist 결제 한번 하는게 이득이지 않을까?
3분정도 생각한 뒤 결제하지 않기로 했다. 15분짜리 요약본으로는 아무리 좋은 관점이나 지식이라도 체화할 자신이 없었다. 지금 내 삶에 실제로 영향을 주는 관점이나 지식은 많은 반복을 통해 축적되었다. 아무리 무릎을 탁 치게 만드는 인사이트라도 한번 스치듯 지나가면 금세 잊어버렸다. 반대로 책은 같은 말을 몇백 쪽동안 반복한다. 비문학 서적은 대부분 1~3개의 핵심 주장을 다양한 예시와 근거로 독자에게 설득하는 양식이다. 그래서 독자는 완독하는 과정에서 같은 말을 인이 박히게 듣게 된다. 그러면서 본인에게 설득력 있었던 한두 개의 내러티브가 장기 기억으로 남게 된다.
완전히 겹치는 얘기는 아니지만 나는 고등학생 때 인강도 배속으로 들어본 적이 없다. 무조건 1배속에 그마저도 자주 멈춰서 곱씹으면서 들었다. 다시 듣는 경우도 많았다. 그렇기에 15분동안 하나의 관점을 습득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나로서는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최근 인스타 피드에서 짧은 자기계발성 영상을 보았다. 어떤 남자가 어깨가 넓어보이고 싶다면 오버핏 티셔츠를 입을 것이 아니라 운동을 하라고 말했다. 문제를 덮지(Cover) 말고 해결(Solve)하라고. 출처가 15분 요약본보다도 짧은 인스타 게시물이니 이 글의 요지에 대한 반례이긴 하지만 근래 접한 메세지 중 가장 인상깊고 기억에 박힌 말이다 (인스타 게시물은 수백개 중 기억나는게 이거밖에 없으므로 주장을 바꿀 생각은 없다). 그리고 이 말은 Blinkist 에피소드에도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요약본은 오버핏 티셔츠이다. 그리고 원서나 고전은 운동이다. 한편 오버핏 티셔츠를 입은 사람은 굳이 벗어서 몸을 보여줄 필요가 없지만 요약본에서 본 지식과 지혜를 유의미하게 활용하려면 결국 밑천이 드러날 수밖에 없다.
아무튼 얼른 점심 차려먹고 오늘도 책이나 열심히 읽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