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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씰리 Feb 08. 2024

드라마는 해피엔딩이어야만 해

요즘 시대에 새드엔딩이 지탄받는 이유, 우리 삶이 해피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춘기 소녀였을 때, 아니 이십대 초반까지도 나는 슬픈 결말로 끝나는 이야기들을 더 좋아했다. 당시에 <늦어도 11월에는>이라는 연애소설을 참 좋아했는데, 거기서 첫눈에 반한 주인공 두 사람이 나누는 첫 대화는 무려 "당신과 함께라면 죽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였다. 그리고 두 사람은 소설 속 결말에 이르러 마침내 그것을 달성한다. 지금도 가장 길게 여운이 남는 드라마의 엔딩씬은 단연코 <발리에서 생긴 일>이다. 탕!탕!탕! 세 발의 총성과 함께 셰익스피어 버금가는 비극으로 끝난 그 드라마를 본 뒤 한동안 나는 그 여운에서 헤어나오지 못해 수업시간에도 이어폰을 몰래 귀에 꽂고 MP3로 OST('난 안되겠니 이 생에서언~ 다음 생에선 되겠늬이~' 로 시작하는 그 절절의 끝을 달리는 노래)를 들으며 주인공들의 슬픈 죽음을 곱씹곤 했다.


꼭 나뿐만은 아니고 2000년대 초중반까지만 해도 그런 새드엔딩이 더 각광받던 시절이었던 것 같다. 송혜교는 백혈병에 걸려 송승헌의 등에 업힌 채 생을 마감하고(가을동화), 조승우는 단지 사랑한 죄로 전쟁터에 끌려갔다가 시력을 잃어 손예진의 눈물도 보지를 못하고(클래식), 심지어 5분짜리 뮤직비디오에서조차 김하늘은 영문을 모른 채 불타는 차 안에서 죽고 그걸 보는 이병헌은 절규했다(조성모의 투헤븐). 


그 시절의 새드엔딩은, 

낭만이었던 것 같다. 


말 그대로 사랑이란 것에 목숨까지 바치는 주인공들에 우리는 기꺼이 눈물을 쏟고 여운을 곱씹었다. 그 시절의 어린 나는 그 허구의 슬픈 러브스토리에 기꺼이 흘릴 눈물과 여운을 곱씹을 마음의 여유가 있었다. 그리고 (그때도 물론 나름의 삶에 대한 고충이 깊었지만서도) 그때의 어린 나는 아직 세상의 쓴 맛을 몰랐다.


시간이 흘러 내가 요즘 드라마를 보면서, 또 요즘 드라마를 보는 사람들을 보면서 느끼는 것은, 요즘은 많은 사람들이 주인공들의 새드엔딩을 정말 못 견디게 싫어한다는 점이다. 극 후반부에 이르러 주인공들의 앞날에 암운을 드리우는 복선이나 BGM 같은 것이 깔리면 시청자들은 발을 동동 구르며 진심으로 불안해한다. 그러다 엔딩에 이르러 주인공이 정말로 죽기라도 하면 댓글로 몹시 화를 내거나, 해석에 따라서는 이렇게 볼 수도 있다는 해피엔딩 가설을 길게 쓴 포스팅을 올리기도 한다. 


나는 드라마를 쓰는 사람이기 때문에 한동안은 오히려 그들의 그 열띤 감정이입이 참 신기했다. 어쨌든 결국에는 픽션인데... 드라마는 드라마로 보면 되는 거 아닌가... 비록 주인공은 드라마 속에서 슬프게 죽어갔지만 그 주인공을 연기한 배우는 종영 후 인터뷰에 환하게 웃는 얼굴로 바로 뿅 등장하는데... 신기하네 차암. 


우선 가장 먼저 깨달은 것은, 하나의 드라마가 방영되는 2달쯤의 기간 혹은 720분+a의 러닝타임이 사람들로 하여금 생각보다 아주 깊은 동기화를 이룬다는 사실이다. 


30대의 평범한 직장여성 A씨의 사례를 예로 들어본다. 그녀는 조직 구성원의 일부로서 직장에서 살아남기 위해 늘 윗사람의 눈치를 보고 적당한 불이익쯤은 참고 넘기며 살아간다. 꽤 만나온 남친과 이제 슬슬 결혼 얘기가 나오기 시작하는 시점인데 사실은 이 남자의 어떤 치명적인 단점을 흐린 눈으로 못 본 척하는 중이다. 근데 우물쭈물하다 얘를 놓치면 결혼을 영영 못할 같아 두렵다. 이놈이 인생의 마지막 남자일지도 모른다는 불안에 시달리던 와중, 

퇴근 후 TV를 틀었는데 <내 남편과 결혼해줘>라는 드라마가 나온다. 

드라마 속 박민영은 나보다 훨씬 비극적인 상황에 처해있기는 한데 어떤 면에선 왠지 그녀의 얼굴에서 내가 보인다. 그렇게 동기화가 시작된다. 나는 아마 내가 처한 현실과 적당히 타협하며 적당하게 살아가겠지만 드라마 속 나와 닮은 너는 좀 달랐으면 좋겠어. 그런 마음으로 여주인공을 응원하기 시작한다. 거지같은 상사를 때려부수고 쓰레기 남친 따윈 갖다버리고 메이크오버로 하루아침에 절세미인이 된 뒤 실은 그동안 그녀를 몰래 지켜봐왔던 백마 탄 왕자재벌순정남과 새로운 연애를 시작하는 과정을, 마치 내 인생처럼 응원하며 지켜본다.

대리만족과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현실의 나는 내가 처한 상황과 적당히 타협하며 살아가겠지만 나와 닮은 이야기 속 주인공인 너는 보다 멋진 삶으로 귀결되기를 바란다. 내 인생은 한 치 앞도 알 수 없기 때문에 나와 닮은 너의 인생만큼은 꽉 닫힌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걸 보고 싶다. 왠지 그것이 나의 부적이 될 것만 같다. 

... 이런 마음에서 비롯된 것 아닐까? 


또 한편으로는, 한때 새드엔딩이 낭만으로 각광받던 시절과 지금이 많이 달라졌음도 느낀다. 드라마 속 주인공이 내가 원하는 만큼 해피하게 끝나지 않을 때 우리가 화가 나는 이유는 

지금의 우리 삶이 해피하지 않기 때문이다.


확실히, 그때보다 지금의 삶이 훨씬 각박해졌다. 한 발만 잘못 내딛으면 곧바로 낭떠러지다. 여러모로 생존의 위협을 느끼는 시대다. 행복은 차치하고 '더 이상은 내 인생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라는 말이 그나마 가장 실현 가능할 법한 시대다. 외줄타기 인생에서 어떤 사람들에겐 드라마가 그나마 잠시 현생을 잊게 해주는 귀중한 오락거리인데 그마저 행복하지 않은 결말로 GAME OVER 되면 절망한다. 이제 우리에겐 허구의 스토리에 기대는 대리만족마저도 사치가 된 것인가?! 


마지막 한편으로는, 허구의 스토리 속 주인공들의 해피엔딩을 염원하는 인간들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 착하다고 느낀다. 이를테면 이런 거다. 로봇청소기에게 청소를 맡기던 어느날 잠깐 현관문이 열린 틈을 타 집 밖으로 나가버린 그 기계의 알 수 없는 행보를 '가출'이라 칭하며 슬퍼하는 인간들. 극한 상황에 몰렸던 유기견이 착한 새 주인을 만나 행복하게 웃는 영상을 보며 라이크를 누르고 진심으로 안도하고 기뻐하는 인간들. 드라마 속 주인공이 이른바 꽉 닫힌 해피엔딩을 맞이하면 마치 내 일처럼 행복해하며 찬양하는 인간들. 

그런 인간들을 보면 마음이 따뜻해진다. 참 귀중한 따뜻함이다. 그런 착한 인간들이 더욱더욱 많아지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들의 인생이 마침내는 반드시 해피엔딩으로 귀결되기를 바란다. 진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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