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나는 혼자 오롯이 서고 싶지 않아!

연애에 의존하는 여자

by 김씰리



0.


비혼주의자이자 연애주의자인 나는 연인과의 이별 후 '혼자가 된 상태'를 극도로 두려워하는 몹시 의존형 인간이다. 또한 연애에 있어 '한놈만 패는' 유형이다. 한번 연애를 시작하면 오래 만난다. 나는 잘 질리지 않는다. 애인과 싸우다가 상대가 홧김에 헤어지자는 말을 뱉으면 그의 멱살을 잡으며 "아니? 내 마음이 식기 전엔 널 놔줄 수 없어!!" 라고 협박한다.

남동생 역시 복사기도 다 아는 사내비밀연애를 N년째 진행 중인데. 한때 (이혼 직후 40대 황금기 시절) 월화수목금금금 매일 다른 남성들과 데이트를 즐겼던 엄마는 이런 우리 남매를 몹시도 신기해한다. "그렇게 오래 만나면... 안 질리니? 어떻게 그럴 수가 있니...??"



1.


20대에서 30대까지 걸친 긴긴 연애를 어렵게 청산하고 솔로가 되었다. 당시의 나는 삼십대 초중반이었다. 마침내 혼자가 되자마자, 겨울 한파 같은 두려움이 나를 뒤덮었다.

당시의 나는 결혼과 비혼 사이에서 아무것도 결정하지 못한 채 애매하게 해매고 있었고, 연애시장에서의 여성의 '나이'에 대한 냉정한 담론들에 몹시 휘둘리고 있는 상태였다. 발밑에 시한폭탄을 둔 기분! 어서... 어서 다음 남친을 만들어야 해...!! 더 나이먹기 전에, 어서!!!


그리고 약 1년 간 친구들이 나의 노력을 인정할 정도로 열심히 남친급구 활동을 펼쳤다.

다만 남이 봐도 내가 봐도 나는 연애시장에서 딱히 내세울 무기가 없었다. 외모, 직업, 학력 심지어 이젠 나이마저도!

주변 사람들에게 소개팅 주선을 부탁하기도 객쩍었으며 실제로 여기저기에 나의 솔로 재입고 소식을 알려도 소개팅 주선 같은 건 들어오지 않았다. 청년 중년 외국인까지 모여 옛날가요 떼창을 부르는 홍대 단골술집에서, 커다란 안경을 쓴 내 옆에 스윽 다가와 '이선희를 닮았어요...' 세월을 거스른 플러팅을 하는 아저씨의 번따 시도 정도가 있었을 뿐이다.



2.


소모임 어플에 가입해 독서모임에 나갔다. 소모임, 동호회... 기실 죄다 취미생활을 빙자한 애인 찾기 활동 아닌가!! ... 라는 나의 후려치기가 무색하게,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이따금 서로 코드가 비슷함을 느낀 남성과 대화를 길게 나누기도 했다. 남성은 자신의 독서 스펙트럼을 끝없이 펼쳐대고, 나는 내가 찼지만 실상은 내가 차인 거나 다름없는 전남친에 대한 넋두리와 욕으로 짜게 식기 일쑤였다.

나보다 한두 살 정도 연상이었던 남자가 나를 표적으로 삼아 대뜸 '결혼을 하고 싶지 않아요? 인간은 모두 외롭잖아요? 저는 올해 안에 꼭 결혼이 하고 싶거든요?' 질문 공격을 펼쳤다. 그의 이상형올해 안에 꼭 결혼을 해야 하는 여성이라면 누구나인 듯 했다. 모임을 마치고도 내가 가는 방향으로 따라오려던 그를 독서모임 운영진 남자가 "집이 그쪽 방향 아니시지 않아요?" 라며 막아주어 다행이었다.


그리고 나는 바로 그 운영진 남성을 흠모하고 있었다.

그는 나보다 다섯 살이 어렸고, 책을 좋아하는 공대남이었다. 외국 유학시절에는 싸구려 위스키를 마시며 밤마다 책을 읽었고, 경기권 회사의 엔지니어로 취직해 자취를 시작한 지금도 퇴근 후 책을 읽는 게 낙이고, 혼자 한장짜리 독후감을 기록하는 게 취미이며, 정말로 책 이야기를 나누는 게 좋아서 독서모임에 나오는 찐 독서광인이었다.

나는 그런 그가 마음에 쏙 들었다. 하지만 그런 그이기 때문에 도저히 내가 파고들 틈새가 없었다.

인프피의 플러팅이란?: 생야채 먹는 모습 보여주기, 멋진 옷을 입기. 라는 밈을 보았다. 3N년 평생 인프피 외길만을 걸어온 나. 그가 모임장인 날만 골라서 모임에 참석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내가 며칠 밤낮 고민 끝에 마침내 용기를 쥐어짜 소모임 앱 쪽지를 통해 그에게 건넨 처음이자 마지막 대화는 이것이었다.

[저 **님... 아까 모임 때 말씀하셨던 영화 제목이 뭐였죠?]

한 시간쯤 후 그는 아주 다정하고 친절하게 영화 제목을 알려주었다. 제목만 알려주었다... 그리고 끝이었다.


만약 내가 조금 더 용기를 내어 적극적으로 마음을 표현했다면 그와 데이트라도 한번 해볼 수 있었을까?

... No.

연하남에게 주접떨다 차인 누나로 기억되지 않은 게 다행일 뿐이다.



3.


역시 인위적인 만남이 필요했다. 소개팅 어플을 깔았다. 그러나 외모가 주요 평가기준인 메인스트림 앱에서 나의 가치는 그리 높지 않을 거란 자기객관화를 거쳤다.

외면보다 내면을 중시하는 이들을 타겟팅한, 자신의 프로필과 성향과 이상형을 글로 길게 적어 공유하고, 대신에 사진은 정말 새끼손톱만하게만 노출하는(클릭해도 절대 커지지 않는), 나의 상태와 니즈에 딱 어울리는 앱을 발견하여 깔았다.



4.


거기서 대여섯 명쯤의 남자들과 만났던 것 같다. 그밖에 동네친구 사귀기 어플, 외국인친구 사귀기 어플로도 몇 명과 만났다. 나는 최선을 다해 그 자리에 임했다. 상대가 마음에 들고 상대도 나를 마음에 들어해 만족스러웠던 날은 기분 좋게 잠에 들 수 있었고, 데이트가 거지같았던 날에는 난데없이 머릿속에 구남친을 소환해 '이게 다 너 때문이야 이샛기야! 니가 나한테 좀만 더 잘했어도!!!' 라 소리없이 절규하면서 야밤에 한강다리를 걸으며 미친 여자처럼 울곤 했다.


그때도 알고 지금도 안다.

내가 애타게 그리워한 건 그 남자가 아니라 연애였음을. 그때의 난 다음 연애를 시작할 준비가 1도 안 된 엉망진창의 상태였음을. 새 남친을 구할 게 아니라 지난 연애의 애도기간과 후폭풍 마무리부터 하는 게 순서였음을.


아니다. 실은 지금도 잘 모르겠다.

낮엔 웃고 밤엔 울던 지난 연애의 후폭풍은 1년 만에 소강되었다. 마침내 서로의 마음을 사로잡은 남자와 다음 연애를 시작한 직후였다. 나는 사랑이 시작될 때에도 한동안 밤마다 운다. 지금은 행복하지만 먼훗날 꿈가루처럼 사라지게 될 이 사랑이 벌써부터 안타까워서. 참, 풍년과도 같은 지랄이다.


혼자 오롯이 설 준비가 되어야 사랑할 자격이 생긴다 vs 사랑은 사랑으로 잊혀지는 게 진리다.

'혼자만의 시간도 잘 보낼 줄 아는 사람이 결혼해도 잘 산다'는 말에는 몹시 동의한다. 결혼은 두 사람의 공간과 생활과 삶이 완전히 결합되는 것이기 때문에 오히려 최소한의 독립성이 보존되어야 한다.


하지만 연애는 모르겠다. 애초에 사람 인 자부터가 이렇게 두 명이 서로의 정수리를 푹 기대고 도킹해야 완성이 되는데

왜 자꾸 날더러 일단 혼자서 오롯이 서라는 것인가? 오뚝이도 아니구?



5.


시간이 지나 그때의 나를 조금 더 객관적으로 회상하며 성찰해 보았다.

나는 이별보다도, 9년 간의 너무나 외로운 연애로 인해 피폐해진 상태였다.

분명 그가 내 곁에 있었는데, 그는 갈수록 나에게 곁을 내주지 않았다. 그에게 이별을 통보한 건 나였지만 차이는 사람처럼 더 대성통곡한 것도 나였다. 끄억끄억 울면서 나는 거의 십년을 함께한 그에게 물었다.

"나를 좋아했었어?"

그 역시 그의 차가움보단, 당시에 스스로를 사랑하지 못하고 내가 사랑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인가? 자문하며 자존감이 바닥을 치던 나의 상태가 더 문제였다.


그러니까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혼자가 되는 건 싫지만, 서로 따뜻한 정수리를 맞대고 도킹하고 싶지만, 내 마음이 건강한 상태여야 내가 바라는 안정감을 가질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앞으로는 그 상대가 반드시 연인일 필요는 없다는 깨달음도.

모두에게 연애를 권하는 사회, 연애하지 않는 자는 루저. 라는 프레임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도.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