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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를 낳고 싶은 남성들

그들의 정자는 정말로 영원히 젊은가?

by 김씰리



1.


드라마를 쓰지만 (정확히는 드라마를 쓰기 때문에..) 드라마를 잘 챙겨보지 않는 내가 매주 가장 열심히 본방사수하는 것은 <나는솔로>다. 이곳에 출연하는 이성들은 모두 결혼주의자이며 자녀출산을 목표로 한다. 메인연출이자 제작자인 남규홍은 작가들의 저작권료를 헤쳐먹는 데 열중하는 한편 자신의 작품이 대한민국의 결혼률과 출산률에 아주 긍정적인 기여를 하고 있다 느끼며, 이를 굉장한 훈장으로 여기고 있음이 몹시 느껴진다.

그런 연출자를 혐오하고 모난 모습을 보이는 출연자에 으으 극혐!! 몸서리를 치며 "이번 기수까지만 보고 하차할 꺼야!!"라고 매번 외친다. 그렇게 외치면서 3년째 수요일 밤마다 온에어를 켜고 목요일 나솔사계까지 꼬박꼬박 챙겨본다. 도저히 놓을 수 없는 도파민. '인간사회실험 참관'이라는 그럴듯한 핑계가 매주 나를 든든한 고정시청자층으로 붙잡고 있다.



2.


나는솔로의 남성출연자 대부분이 원하는 상대방의 주요 요건은 나이다. 사전 인터뷰에서는 '아무래도 제가 나이가 있다 보니 / 근데 저는 아이를 갖고 싶어서 /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연하인 여성분을 선호합니다하하하' 라는 고정답안.

출연자로 뽑힌 후 자기소개 시간에 이어지는 질의응답에서 출산에 관련한 질문을 받으면 '그건 제가 선택할 수 없는 영역이라 / 아이를 직접 낳는 여성분의 의사가 중요 / 그녀의 의사에 따르는 것이 맞다고 생각합니다하하' 라는 모범답안. 제출 후 감탄의 박수갈채.


한편 30대 중반 이상의 여성들의 자기 어필 멘트 중 하나는 '전 건강한 난자를 미리 얼려놓았답니다?' 이다. 남성들은 이를 몹시 도발적인 발언으로 느껴 얼굴을 붉히며 워후 대단하다.. 환호를 건넨다.



3.


처음에는 남자들이 그저 '어리고 예쁜 여자가 좋다'는 말을 할 수 없어서 출산을 핑계로 돌려 말하는 줄 알았다. 하지만 나이를 먹으며 차츰 깨닫게 되었다. 그것은 핑계가 아니라, 진심이라는 것을.


통상적으로 남성의 정자는 70대가 되어도 늙지 않고 죽지 않는다고 한다. 그 성공사례를 김용건 선생님께서 몸소 보여주신 바 있다.

다만 이따금 궁금해지는 것이 있다. 출산을 원하는 이들은 각각 '정자의 나이'와 '난자의 나이'를 검사하지 않는가? 즉슨, 신체 상황에 따라 난/정자 나이가 모두 다르다는 것 아닌가? 아니라면 왜 굳이 그것의 나이를 따로 검사해 책정하는가? 같은 40대여도 건강관리를 잘한 누군가의 신체나이는 20대이고, 잘 못한 이의 신체나이는 50대이기도 하지 않은가?

헌데 왜 남성의 정자는 모조리 통상적으로 영원한 불로초로 평가 받고, 여성의 정자는 금세 져버리는 한철의 꽃 취급을 받는가?

이에 대한 전문지식이 전혀 없기에 나는 이 현상이 몹시 이상하다.



4.


6살 연하의 남성과 결혼한 여자 선배가 있었다. 그녀는 능력이 좋아 몹시 일찍 성공했으며 어여쁜 데다 동안이었고, 자기애도 높았다. 그런 그녀가 6살 연하의 남자와 사랑에 빠진 뒤 어느날 한숨처럼 뱉은 넋두리는 내겐 몹시 신선한 충격이었다.

"아아... 늙고 싶지 않아...!"

오죽했으면 이런 넋두리가 튀어나왔을까... 이해도 되었다. 하지만 결혼 후 함께 난/정자 검사를 받은 결과는 반전이었다. 여자 선배의 난자가 6살 연하 남편의 정자보다 건강했으며, '나이'도 남편보다 더 어리게 나왔다고 했다. 그리고 현재는 어여쁜 딸을 낳아 잘 살고 있다고 한다.


결혼은 했지만 출산 생각은 없었던 언니도 있었다. 공교롭게도 둘 역시 3살 차이의 연상연하 커플이었고, 둘 다 한때는 헤비스모커였으며, 둘 다 건강하기보단 '맛있는' 외식을 좋아했다. 언니가 마흔이 됐을 때 예정에도 없던 자연임신이 덜컥 되었다. 몹시 건강한 아들을 낳은지 2년 만에 예상치도 못한 자연임신이 또! 덜컥 되었다.

너무나도 건강한 아들 둘을 낳은 그녀. 아이들이 어린이집에 가있는 동안 작업실에 출근해 열심히 글을 쓰고, 아이들이 하원하면 엄마로 출근하여 에너자이저 같은 아들들을 보필한다.


물론 내 주변의 이 소수사례들을 일반화할 순 없다. 하지만 사회 전반적으로 펼쳐진 더욱 거대한 일반화 앞에서 이 정도는 이야기해도 괜찮지 않을까?



5.


20대 시절, 나의 첫 남자친구에게 나는 첫 여자친구이기도 했다. 연애 초반, 피임을 제대로 하지 못한 것 같아 나의 다음 생리가 무사히 시작되기만을 기다리며 공포에 떨었던 때가 있었다. 둘이 카페 구석자리에 앉아 서로 손을 부여잡고 비나이다비나이다 하던 중, 남자친구는 필사의 행복회로를 돌리며 이렇게 중얼거렸다.

"괜찮아. 난 술도 많이 먹고 담배도 많이 피니까 정자가 다 죽었을꺼야. 걱정마!"

그때 그는 스물여섯 대학 졸업반이었다.


그리고 몇 년 뒤 이십대 후반의 직장인이 된 그는 나와의 권태기를 토로하며 이렇게 말했다.

"난 남자니까 여유가 있지만 넌 여자잖아. 너의 귀한 시간을 내가 낭비하고 있는 것 아닐까? 내 시간은 괜찮아. 너의 시간이 걱정될 뿐이야. 네가 아직 예쁠 때 널 놓아주는 게 맞지 않을까?"


6.


현재 삼십대 중반에서 사십대 초반 무렵의, 연하의 이성을 원하거나 사귀고 있는 주변 남성지인들에게 그 이유를 직접 물어보기도 했다. 역시 다들 비슷한 답변들을 했다. '난 아이를 낳고 싶기 때문에.' 본인의 정자는 나이와 상관없이 젊을 것이라는 굳건한 믿음.

나는 위와 같은 생각을 가진 결혼/출산을 원하는 남성이기 때문에 나이가 들수록 섣불리 연애를 시작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끌리는 여성의 나이가 적지 않을 때. 감정을 앞세워 어설프게 연애를 시작했다가 헤어지게 되면, 내가 낭비한 그녀의 시간은 어찌 보상할 것인가?

이렇게 이타적일 수가 없다.



7


나이 든 여성에 대한 진심어린 걱정. 에 사로잡혀 섣불리 사랑을 시작하지 못하는 자기자신에 대한 깊은 고뇌와 연민. 에 빠진 나이 든 남성들.

이 나는 몹시 흥미롭다.

내가 그걸 그저 흥미롭게 관조할 수 있는 이유는 내가 결혼/출산 생각이 없기 때문이다.

결혼/출산을 원하면서 한 해 한 해를 보내고 있는 싱글여성들에게는 이것이 직접적인 장애물이자 공포일 것이다.



8.


물론 나에게도 이성을 보는 몹시 세속적인 기준들이 있다.


난 키 큰 남성을 좋아한다. 나보다 적어도 머리 반통 정도는 커야 이성으로 보인다. 그리고 똑똑한 남자를 좋아한다. 똑똑함을 증명하는 졸업장이나 직업을 가진 남자에게 훅 끌린다.

이 이상형에는 나름의 자기연민으로 점철된 이유들이 있다.

전방위적으로 모지란 아빠를 두었기 때문에 그 부성애의 갈증을 연애로 채우고자 하는 욕구가 강하다. 내 남자에게만큼은 몹시 의존하고 싶다. 난 키가 큰 편에 속하기 때문에 나보다 키 큰 남자를 만나 물리적으로라도 우러러보고 싶다. 난 가방끈이 짧기 때문에 똑똑한 남자를 만나 그에게 자아의탁을 하고 싶다. 내가 모르는 걸 상대가 다정하게 가르쳐주는 걸 좋아한다.


그러니까 다들 자신만의 '빻은' 기준은 분명히 있는 것이다.


다만 나는 대다수의 남자들이 본인의 정자가 불로초일 거라 믿어 의심치 않는 게 마음에 들지 않을 뿐이다. 그럴 거면 자신의 정자 나이 검사 결과지라도 근거자료로 상대이성에게 제출했으면 좋겠다. 여성들이 자신의 냉동난자를 근거자료로 어필하듯이.


아이를 원하지 않거나 더 이상 낳을 생각이 없음에도 자신이 '묶는' 것은 할 수 없다는 남성들. 진지한 고뇌 끝에 끝내 "미안하지만 이건 남자의 자존심이라 도저히 할 수 없을 것 같아. 미안해...!! (그러니까 나 대신 니가 묶었으면 좋겠어)" 라고 하는 남성들.

그 자존심이란 대체 정확히 무엇일까?

그것이 궁금해서 하루쯤은 남자가 되어보고 싶다는 생각도 가끔 든다.

이에 대해 조만간 또 주위 남성 지인들에게 허심탄회한 고견을 들어보아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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