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가 좋아 드라마 공부를 시작한 뒤 드라마가 싫어진 여자
회사 피디님들과 미팅의 주요 안건 논의를 갈무리하고 나면 이 질문이 이어진다.
'요즘 드라마 뭐 보세요?'
동료 작가님들과 만나 수다를 나누다 보면 으레 이 하소연이 이어진다.
'드라마가 안 봐져요. 봐야 하는데 보기 싫어요. 전 쓰레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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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살 무렵부터 14살 무렵까지 우리 가족은 외할머니 집에 얹혀살았다. 외할머니가 작은 방을 쓰고 우리 네 가족은 큰 안방에서 옛날 군대처럼 쭈르르 나란히 누워 잤다. 집안에서 벌어지는 모든 큰 사건은 그 안방 안에서 벌어졌다. 도망칠 구석이라곤 없었다.
그나마 유일하게 평화로운 시간은 매일 밤 10시. 그때만큼은 모두 잘 준비를 마친 뒤 불을 끄고 각자의 이불에 눕거나 앉아서 TV 드라마를 보았다. 웃긴 장면에 킥킥 웃고, 키스신이 나오면 괜히 눈 돌린 척 가자미눈으로 똑똑히 관전했고, 슬픈 장면이 나오면 절대 서로 눈을 마주치지 않은 채 몰래 눈물을 훔치고 음소거로 콧물을 먹었다.
나에게 드라마는 평화의 상징이었다. 어느 드라마 속 로맨스에 푹 빠지면 학교에서도 일주일 내내 그 주인공들만을 떠올리며 여운을 즐겼다. 아, 그 둘이 꼭 이루어졌으면,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로 끝났으면...!
나도 그런 드라마를 쓰고 싶어졌다. 그래서 드라마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공부하는 동안에는 각종 드라마 대본과 영화 시나리오를 읽는 재미에 푹 빠졌다. 내가 봤던 영상드라마의 대본을 보는 것도 신기했고, 내가 보지 않은 영화 시나리오 속 지문과 대사를 따라가며 영상을 상상하는 것도 아주 재밌었다.
그러나 지금은 드라마를 보지 않는다.
내가 쓴 드라마를 온 세상 사람들이 봐주길 원하지만, 정작 나는 남의 드라마를 보지 않게 되었다.
드라마가 재밌으면 부러워서 배가 아파서 화가 나고, 드라마가 재미없으면 저딴 이야기에 큰돈을 꼬라박은 것이 분해 화가 난다. 어릴 때처럼 이야기를 즐기기는커녕 한 장면 한 장면을 머릿속으로 분석하고 평가하는 것이 지겹고 지친다.
드라마를 쓰게 되니 드라마를 보는 행위까지도 '일'이 되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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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하는 일을 직업으로 삼지 말아라' 는 말을 아주 가슴 깊이, 온몸 흠뻑 이해한다.
나는 내가 가장 좋아했고 가장 소중했던 취미를 잃어버리고 말았다.
드라마 보기가 취미인 사람들이 세상에서 가장 부럽다.
카페에서 '어제 그거 봤어?' 하며 드라마에 대한 찬사와 수다에 열을 올리고, 자신의 인생드라마를 재탕 삼탕하고, 커뮤니티와 트위터 등에 찬사의 글을 올리는 이들의 그 맑은 진심이 부럽다.
재미없는 드라마가 재미없는 이유를 공들여 비판하고, 좋아하던 드라마의 줄기가 갑자기 산으로 가면 진심으로 화를 내는 사람들의 열정도 아름답고 부럽다. (* 물론 무지성 악플은 예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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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를 담은 영상물은 더 이상 나의 행복이 될 수 없기에
책을 읽는다.
독서는 드라마 시청 다음으로 사랑해온 취미다.
중고교 시절 내내 책가방에 교과서와 문제집 대신 도서관에서 빌려온 책을 한가득 넣고 다녔다.
수업시간에도 책을 읽었다. 고2 때 담임이 수학선생님이었고, 나의 수학 성적은 근 전교 꼴찌였다.
당당하게 수학책 대신 소설을 펼쳐 읽는 나를 수학선생님은 칭찬했다.
'**이 넌 참 시간을 효율적으로 쓰고 있구나? 안되는 건 안되는 거야! 잘~하고 있어!!'
그 칭찬에 힘입어 더 열심히 책을 보았다.
거의 유일하게 교과서를 봤던 것은 역시 문학 시간이었는데, 수업은 한귀듣 한귀흘 하며 혼자 다음 학기에나 배울 100페이지 뒤의 소설을 읽고 있었다.
그때와 똑같은 마음으로 드라마 모니터링 대신 각종 책을 읽고 있다.
책을 쓰는 사람은 되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학창시절에 공부 대신 책으로 도피하며 '선생님 말대로 난 효율적으로, 나만의 방식으로 나의 지식을 쌓고 있는 거야' 정신승리하던 때처럼,
일도 하지 않고 드라마도 보지 않은 날에 책을 읽고 맘에 들어온 구절을 필사하는 나 자신을 보며
'음 그래도 오늘 하루 제법 알차게 보냈군' 이라고 정신승리하는 나.
이제 나에게 (정확히는 나 스스로) 허락된 영상이라곤 인스타 유튜브 쇼츠 뿐이다. 슬픈 도파민의 노예.
사람들이 점점 60~70분 분량 드라마에 집중하기 어려워하고,
내 드라마를 유튜브 요약으로만 흘려 보는 사람들을 상상만 해도 가슴이 아프면서도,
그런 이들을 욕할 자격도 없이 그들만도 못한 삶을 살고 있는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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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직업과 정반대의 취미를 가져라' 라는 말에 공감하며 그 취미를 찾는 중이다.
한동안 독서모임에 나가보았지만, 제법 즐거웠지만, 스트레스가 해소될 정도의 재미는 없었다.
드라마 시청 대신 책 읽기가 좋다 해도, 결국엔 나의 직업과 같은 카테고리에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4월 한 달 동안 훌라수업을 들으며 <취미의 재미>라는 것을 처음으로 체감했다.
늘 카페나 작업실 책상에 앉아만 있다가 훌라치마를 두르고 야외에서 맨발로 춤을 추니 해방감이 들었다.
현재는 방송댄스 수업하는 곳들을 검색 중이다.
어쩌면 댄스야말로 나의 취미 엘도라도인 것일까! 기대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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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어쨌든 드라마 쓰기는 내가 가장 '좋아했던' 일이자, 현재 내가 가장 '잘하는' 일이다.
그러니 '성실한 무기징역수(*드라마 <나의 아저씨>에 나온 표현)'처럼
보며 즐기진 못해도
사람들이 즐길 만한 걸 쓰는 일에 몰두할 것이다.
다른 즐길꺼리로 숨쉴 구멍을 만들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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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직업의 사람들도 모두 나와 같은 딜레마를 겪고 있을까?
또한 번외로, 나의 직업을 이야기하면 으레 '글 쓰는 것 재밌으세요?' 라는 질문이 따라붙는다.
나는 '...^^. 재밌을 때도 있어요.. 아주 가끔은...' 이라고 답하곤 한다.
자기 직업이 재밌는 사람은 참 희귀할 것 같은데. 다른 직업인들도 이 질문을 많이 받을까?
궁금하다..
나는 드라마를 쓰는 일이 아주 가끔 재밌고,
대체로 괴로워하며,
전생(*심지어 환생을 믿지도 않음)에 대체 무슨 죄를 지었기에 이런 천형을 받았담?! 이라 혼자 나의 멱살과 머리채를 쥐어뜯으며 버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