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스텝 없는 퇴사를 한 이유
아주 어릴 때부터 보물찾기를 좋아했다. 사실 지금 더 좋아한다. 초등학생 시절 소풍을 가면 여러가지 프로그램들에 참여하게 되는데, 장기자랑 같은 것들은 보는 둥 마는 둥, 듣는 둥 마는 둥 했고 신경은 이미 오후에 있을 보물찾기에 가 있었다. 선생님이 여기서 저기까지야 라고 수색 범위를 알려주시면, 그 때부터 두근두근 심장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너무 흥분한 나머지 시야가 흐려져 눈 앞에 두고도 못 보고 지나칠 때가 많아 선생님이 입술을 쭉 내미시면서 “쪼오기~”라고 힌트를 툭 던져주시곤 하셨다. 그렇지만 남자 아이들에게서 으레 보이는 치기 어린 자존심 같은 게 있어서 괜히 애꿎은 곳을 뒤적거리다 허탕을 칠 때도 많았었다. 그렇게 한바탕 소란이 지나가면 학생들은 두 개의 집단으로 나뉘었다. 양손 가득 종이를 들고 의기양양해 하는 집단과 두꺼운 머드팩을 한 것처럼 표정이 없는 집단. 나는 자주 의기양양했다.
그 때의 내가 보물찾기를 잘했던 이유는 고사리 채취 때문이 아닐까 싶다. 매년 4월이 되면 엄마를 따라 고사리를 채취 하기 위해 ‘불탄산’에 올라서 고사리를 땄었다. 오래 전 산불이 난 이후에 불탄산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는데, 그럼 그 전에는 이름이 없었던 걸까. 화재 이후에 고사리가 나기 시작했고 사람들이 찾기 시작했다는 이야기를 듣고선, 높이든 모양이든 혹은 자원을 베풀든, 인간에게 유익해질 때 그제야 이름이 붙는 거라고 생각했었다. 기능적 인간 앞에서 고유성은 결국 기능이 있음을 증명해야 획득할 수 있는 것일까.
‘베푼다’고 해서 고사리 채취가 쉬울 것 같지만 보물찾기와는 소위 말하는 클래스가 다르다. 마사토로 이루어진 땅, 기름진 흙, 음지와 양지 가릴 것 없이 다양한 곳에서 발견이 되고 낙엽이나 작은 나무들과 풀들 사이에서 은엄폐하고 있어서 찾기가 어렵다. 규칙이나 일정한 패턴이 없기 때문에 꼼꼼하게 찾는게 정공법이자 요령이다. 마을 대소사를 그냥 못 넘기는 푼수떼기 마냥 여기저기 기웃거리다 보면 봄 볕에 비지땀을 흘리며 자고 있는 고사리를 찾을 수 있었다. 나 역시 봄 햇살에 미지근하게 데워진 땀을 흘리면서 ‘아무데서나 막 자라네. 힘들게.’ 라고 한탄을 했었다.
불탄산의 고사리처럼 어떤 식물이 ‘막 자란 아무 곳’을 자생지라 부른다. 정확한 사전적 의미로 ‘저절로 나서 자라는 곳’인데, 이 정의는 적극적으로 생을 이어가는 ‘산다’ 라는 개념보다 자라지 않고는 못 배겨서 저절로 ‘살아진다’는 의미에 가깝다. 이 정의에 따르면 전에 없던 고사리가 갑자기 불탄산에 등장한 이유를 설명할 수 있다. 그리고 얼마 전 본 응봉산에 핀 개나리들을 이해할 수 있다.
꽃샘추위가 물러간 어느 날, 나는 ‘다음 스텝을 정하지 않은 퇴사’를 결심하고 성수의 단골 미용실에 다녀왔다. 교통 체증을 겪은 덕분에 응봉산을 가득 채운 개나리를 천천히 볼 수 있었다. 도심 한 가운데 개나리가 덮인 산이라니. 개나리가 자신이 자랄 곳을 선택할 수 있다면 자리에 옹색한 바위산보다는 초등학교의 울타리나 공원의 조경을 택하지 않았을까란 생각을 했다. 공상은 자연의 숭고미를 예찬하기에 가장 적절한 방법론이다. 아무튼 지금 개나리는 응봉산에 피어 있고 그렇다면 그것은 “살아짐” 아닐까. 그리고 개나리의 살아짐은 나의 퇴사 결심에 생기를 불어 넣었다.
십 년 간, 소속이 분명한 직장인으로 살았다. 불편해도 잘 못해도 하루는 완료됐고 안전하고 넉넉했다. 나의 성실, 능력과는 무관하게 회사의 이름만으로 설명이 되는 편리가 있었고 노트북이면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는 평화가 있었다. 그럼에도 속이 시끄러운 날들이 계속 이어졌다. 존경하는 시인은 '날아가는 새는 뒤를 돌아보지 않는다'고 했지만 지하철을 타는 직장인인 나는 자꾸 뒤를 돌아봤다. 그리고 그 곳에는 내가 없었다. 직원들의 몰입을 높이는 일을 하며 행동을 분석하고 이해하는데 십 년을 썼지만, 나의 감정에 이름표를 붙이는 일은 하지 않았다. 직원들을 자라게 하고 피어나도록 하기 위해 내내 분주했지만 정작 나 자신은 지나치게 호젓했다.
나는 없는 나날들에 답답했고 지쳐갔다. 날 좋아 해주는 동료나 높은 연봉, 자유로운 회사 분위기 그리고 이것들의 총합으로 삶의 과제를 차근차근 해결해나가고 있다는 사실로도 상쇄되지 않았다. 납같이 무거운 마음이 아침마다 한숨으로 나와 몸을 납작하게 짓눌렀다. 몸이 무거우니 마음만 홀로 바깥으로 나돌았다. 집에 이런 인테리어 하고 싶다, 개인 연금 수익률은 어떻지, (아직 월요일인데)주말에 어디 놀러가지?. 안전하기 때문에 쉽게 오는 생각들과 월급 속에 진짜 내가 해야 할 결심이 숨어있었지만, 뒤적이기를 주저했다. 하지만 겨울 그림자가 걷히면 새 움이 트듯이 결국 나는 마주하게 됐다.
봄의 기침이 참아지지 않는 것처럼 한번 시작한 마음은 멈춰지지 않았다. 나는 십 년 동안 두 번의 퇴사 결심을 했었고 회사에도 밝혔었는데 두 번이 모두 4월, 봄이었던 건 우연일까. 그리고 두 번째 봄, 나는 퇴사를 한다. 소속이 없어지는 것이 처음이고 걸어보지 않은 길에 들어서게 된다. 걸음을 처음 배울 때처럼 매사에 기우뚱 할 것 같다. 가스레인지 불을 끄지 않은 사람처럼 허둥지둥 할 지도. 하지만 나는 고사리와 개나리의 “살아짐”을 믿는다. 퇴사를 결심한 이후로 해보고 싶은 것들을 고민하는 과정과 의논을 이어오면서 내 주변은 자연스레 작가가 되는 것으로 정리되었다. 친구, 지인들에게 퇴사만 얘기하고 앞으로 계획은 말하지 않았음에도 난 당연히 글을 쓸 것으로 예상했다. 이게 내 살아질 환경이다. 그럴 일 없지만 내가 지치더라도 주변이 날 살아지게 만들 거라는 확신이 이 결심을 더 공고히 만든다. 데이터로 세상을 해석하는 시대에, 자기 확신인 덕목인 사회에서, 운에 기댄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그러면 난 다시 봄을 꺼내 든다.
봄마다 산수유, 철쭉, 벚꽃이 개화 순서를 헷갈리지도 않고 잘 찾아오는게 신기하다. 마치 자신의 순서를 맞추기 위해 속도를 늦추지 않고 빠르게 달려가는 버스를 생각나게 한다 또 생을 이어가는 사람들을 연상케 한다. 취업이라는 과업을 해결하면 바로 결혼이라는 숙제가 기다리고 있다. 너무 늦지도 빠르지도 않게 시간에 잘 맞춰야 한다. <시간을 정복한 남자, 류비세프>를 보면 그는 시간을 분 단위로 쪼개면서 곤충 분류, 곤충 조직 같은 업무를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를 보고 혹자는 철저한 시간 관리법이라고 하지만 나는 다르게 읽었다. 계속 시계를 들여다보는 삶은 되려 시간으로부터 해방되지 못한 것만 같았다. 과연 그 삶은 행복할까.
봄 꽃은 개화 하기 위해 내달리지 않는다. 나무를 데우는 햇빛, 온화한 온도, 사람들의 소란스러움 등 환경이 무르익으면 그 때 저절로 피어나는 것이다. 피어나는 일이 마냥 포근하지만은 않겠다. 불안하고 의심되고. 하지만 꽃샘 추위 뒤에 개나리가 온 것처럼, 봄은 바람이 찢은 틈에서 온다. 살아진다.
삶도 역시 그랬으면 좋겠다. 삶을 일구어가면서 그 밭 한 켠에 ‘살아짐’이라는 여유로움을 심는 것. 그래서 가끔은 고사리를 찾기 위해 헤매보거나 , 모든 소란을 삼켜버리는 눈처럼 고요함을 추종해보는 것. 그럼에도 살아진다는 것을 믿는 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