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목포에서 배 타고 4시간 정도 가는 섬에서 자랐다. 섬이지만 꽤 크고 논농사를 많이 지었다. 그 당시에는 사람도 꽤 많이 살았었다. 추석이나 설날에는 마을 행사를 성대하게 치루기도 했다.
들판에 가을 곡식들이 익어가고 옹기종기 모여있는 시골 마을의 집에서는 저녁을 차리는 분주함이 느껴졌다. 머리를 맞대고 모여 딱지치기하던 아이들은 빨리 들어와 밥 먹으라는 엄마들의 외침에 이끌려 하나씩 하나씩 각자의 집으로 돌아갔다.
같이 놀던 친구들이 집으로 들어가자 나도 무릎에 묻은 흙먼지를 탈탈 털며 집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손에는 엄마 몰래 집에서 공책을 찢어 접은 딱지 몇 개만 남아 있었다. 딱지 치기를 시작할 때는 두 손 가득 차 있었는데 어느새 많이 잃어버렸는지 몇 개 남지 않은 딱지에서 아쉬움이 밀려왔다.
얼마 남지 않은 딱지 지만 집으로 들어갈 때는 윗도리를 빼 허리띠와 배꼽 사이에 꽉 찔러 넣고 빈손 인 양 윗도리로 덮어 집으로 들어갔다. 공책을 찢어 딱지를 만든 걸 엄마에게 들키기라도 하면 혼날게 뻔했기 때문이었다. 무사히 방으로 들어와 허리띠와 배꼽 사이에 꼽아 논 딱지를 빼서 책상 서랍에 넣어두고 엄마를 불렀다.
"엄마! 나 배고픈께 빨리 저녁밥 주쑈!"
"아따~ 그란께 빨리 들어와 씻고 밥 먹을 준비 해야지. 놀 거 다 놀고 인자사 들어와 배고프다고 그라냐!"
"친구들하고 딱지 치기 하고 있었응께 그라제라~ 아따 엄마는 알면서 그라요? 배고파 죽겄응께 빨리 밥이나 주쑈!"
"니 뱃속에는 거지가 들었다냐? 으째 맨날 배만 고프데?"
"내가 어떻게 안다요? 엄마 새낑께 엄마가 더 잘 알것제! 배고픈께 배고프다고 그라제라~ 엄마 빨리 밥줘롸~"
"알았응께. 거 머시냐. 밥먹기 전에 엄마 심부름 좀 하고와라! 알았지야?"
"와따~ 배고파 죽겄는디 뭐를 시킬라고 그라요?"
"쓸데없는 소리하지 말고 빨랑 댕겨와! 잔돈은 니 용돈 하고~"
"진짜 지라? 잔돈은 내가 가져도 되지라? 킥킥킥"
"그래. 배고픈디 밥묵어야 항께 빨리 갔다 오니라!"
"네~ 알았어라!"
점심을 먹은 후 아무것도 먹은 것 없이 친구들과 딱지치기며 칼싸움한다고 동네를 헤집고 다닌 후 해 질 녘 집으로 돌아와 배가 무척 고팠다. 바로 저녁을 먹어도 힘들 텐데 엄마가 심부름을 시키자 순간 짜증이 났다.
다행히 물건을 사고 남은 잔돈은 내 용돈으로 하라는 말에 점방(슈퍼)에서 파는 아메 다마(왕사탕) 생각이 나 순간 배고픈 생각이 싹 가셨다.
"엄마, 점방(슈퍼)에서 뭐 사오믄 되요?"
"응, 거 머시냐. 점방 아주머니한테 '오버나이트' 하나 주라고 해라. 자 돈 여깄다.'
"어버...... 오버...... 뭐시라고라?"
"'오버나이트' 주라고 하면 아줌마가 알아서 줄 것이다."
"아따~ 오번가 머신가 이름도 희안하네잉. 엄마 그것이 뭔디라?"
"너는 몰라도 돼야~. 아줌마한테 그렇게 말하면 알아서 줄 거니까 빨리 가서 사 가지고 와라잉~"
"예. 알았어라~ 아따 근디 이름이 뭐라고 했어라? 오버......."
"오버나이트!"
"알았어라~ 잔돈은 내꺼지라? 하하하"
"그래. 빨리 갔다 와라"
엄마가 시키는 심부름의 물건은 난생처음 들어 보는 것이었다. 이게 먹는 건지 아니면 바르는 건지 섬마을 초등학교 5학년으로서는 도저히 정체를 알 수 없었다.
그 물건의 정체보다는 물건 사고 남는 돈이 내꺼라는 생각에 기분이 좋아 냅다 점방으로 달렸다.
배고프다고 노래를 부르던 놈은 어디로 갔는지 해가 저물어 어두스름한 시골 마을 고샅을 쏜살같이 달려 마을에 하나밖에 없는 점방으로 향했다.
점방 문 앞에는 간판을 대신해 초록 바탕에 '담배'라는 빨간 글씨가 적힌 작은 간판이 저 집이 점방이구나 하는 생각을 가지게 했다.
밑에는 샷슈로 되어 있고 위에는 유리창이 끼어진 미닫이 문을 열자 '끼익~' 소리가 났다. 가게 안에서 저녁을 먹고 고사리를 다듬던 주인아주머니가 소리가 나는 쪽으로 무의식 적으로 눈을 돌렸다.
"안녕하세요! 물건 사로 왔는디라~"
"응. 김 선생네 큰아들 아니냐! 그래 뭐 사러 왔냐?"
"......"
"말을 해야지. 뭐 주리?"
"......"
갑자기 엄마한테 들었던 '오버나이트'라는 단어가 생각나질 않았다. 처음 들어 본 단어였고 잔돈 남으면 아매 다마(사탕) 사 먹을 생각만 하고 있었던 터라 처음 들은 단어는 도저히 기억이 떠오르지 않았다.
순간 난감해졌다. 다시 집으로 돌아가기에는 배가 너무 고팠다. 그때는 지금처럼 모든 집에 전화기가 있는 것이 아니었다. 전화기가 있다고 하더라도 요금이 비싸 전화해서 물어본다는 것은 혼나기 뻔했다.
안타깝게 그 다섯 단어는 떠오르지 않았다. 최대한 기억을 더듬어 올라갔지만 역시나 떠오르지 않았다.
"오....... 오...... "
"뭐라고야? 오~ 가 뭐시데?"
"긍께. 오....... 오...... 왐마! 아줌마 생각이 안 나 불어요~ 으째야 쓰께라~"
"잘 생각해 봐라. 느그 엄마가 방금 말했을 텐디 기억을 못 해부냐? 아따 김 선생네 큰아들 똘똘하다고 동네서 소문났더구먼 그것도 아닌갑네. 하하하"
"아니. 그것이 아니고라 나도 생전 첨 들어본 말잉께 그라제라. 아줌마는 앙끄도 모르고 그라요? 와따메 배고파 죽겄는디!"
드디어 밥을 먹을 수 있다는 기쁨과 잔돈이 생긴다는 기쁨이 더해져 행복이 물밀듯이 찾아들었다.
아주머니는 점방 구석으로 가시더니 신문지를 펼치고 그 오버나이트라는 물건을 정성스레 말아서 검은 봉지에 넣어 주셨다.
"아줌마! 근디 이것이 뭐하는 것이다요?"
"하하하. 집에 가서 엄마한테 물어봐라"
"아따~ 별 중요한 거 같지도 않은디 말도 안 해주요? 알았써라~ 나 배고픙께 빨리주쑈! 집에 가서 밥묵어야 항께~" 천 원짜리 지폐를 건네고 잔돈을 받았다.
손위에 떨어지는 동전 몇 개에 '오버나이트' 인지 뭔지는 관심도 없었다.
한 손에는 검은 봉지를 잡고 다른 손에는 몇 개 안 되는 동전을 꽉 쥐며 쏜살같이 집으로 달렸다.
"엄마! 나 갔다 왔어라~ 근디 이것이 뭐시돠?"
"너는 몰라도 됭께. 배고픈디 밥부터 묵어라!"
"네~ 나 배고파 죽겄쏘. 빨리 밥주쑈~ 와따 점방에서 이거 이름 생각 안나서 큰일 나부렀어라~ 다행히 주인아주머니가 알고 있어서 사왔제 안 그랬으면 또 집에 올 뻔했어라~ 하하하"
"그래. 고생했다. 빨리 밥 먹어라!"
그 일이 있고 내가 커 가면서 그 '오버나이트'라는 물건이 생리대라는 걸 알았다.
나중에 그 사실을 알고 난 후 그 일을 생각하니 얼굴이 불그스레 지며 웃음이 나왔다. 아무것도 모르고 슈퍼에 들어가 생리대가 뭔지도 모르면서 무작정 달라고 했을 때 주인아주머니는 얼마나 황당했을 것이며 심부름을 하고 와 엄마에게 '오버나이트'의 존재를 캐뭇는 속없는 아들을 볼 때 엄마가 얼마나 어이없었을까 하는 생각에 재밌기도 했다.
얼마 전 회사에 출근해 있는데 아내에게서 전화가 왔다. 회사에 출근하면 전화보다는 주로 카톡을 사용 하는데 안 오던 전화가 오자 약간 긴장이 됐다.
전화를 받아 얘기를 들어보니 큰 아이가 초경을 했다고 했다. 그 말을 듣는데 많은 생각이 들었다.
'어린아이 같기만 하던 애가 벌써 이렇게 컸구나!', '이제 조금씩 아가씨가 되어가는구나'
앞으로는 아이처럼 대하면 안 되겠다는 생각과 함께 알 수 없는 감동이 밀려왔다.
전화를 끊고 내가 큰아이와 비슷한 나이였을 때 엄마가 생리대 심부름을 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과거로 돌아가 그 당시 상황이 떠올라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리고 엄마 생각이 났다. 지금은 폐경이 되었을 엄마 생각이 났다. 피식 웃음이 나왔던 내 얼굴은 순간 진지해졌다.
자식들과 가족을 위해 한 평생 희생하고 폐경을 맞이한 엄마에게 많은 미안함이 밀려왔다. 마음 같아서는 정말 잘해드리고 싶은데 그렇지 못하는 아쉬움 때문이었다.
꽃같이 젊은 날 자식들을 위해 희생하시고 이제는 몸도 마음도 많이 노쇄해진 어머니 생각을 하니 가슴이 먹먹해졌다. '자식사랑은 내리사랑'이라는 핑계로 아이들만 챙겼던 게 반성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