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재 대리와 선수는 다시 오토바이를 출발시켰다.
"선수 씨 이번엔 잘 따라올 수 있죠?"
"네. 이대리님 잘 쫓아가도록 하겠습니다."
선수는 이마의 땀을 닦았다. 힘겹게 출발했는데 한 100m쯤 가서 이 대리가 오토바이를 멈췄다. 선수는 뭐가 문제가 있나 궁금해하며 그 옆에 오토바이를 댔다.
"이 대리님. 무슨 일 있나요?"
"무슨 일은~ 진짜 일이지. 이제 시작해야지. 하하하"
"벌써 도착했나요?"
"왜. 너무 가까워?"
"아닙니다."
선수는 말대꾸하는 거 같아 그냥 '네~'라고 대답했다.
이성재 대리가 자신의 검은색 가방을 한쪽 어깨에 들쳐 메고 다른 손으로 올백 머리를 한 번쓰윽 넘겼다. 뺀질뺀질해 보였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사수로서 듬직함이 더 보이는 듯했다.
"선수 씨? 나 하는 거 잘 봐. 이게 산 교육이니까."
"네. 이대리님"
이성재 대리가 해피 저축은행과 그리 멀지 않은 마트로 당당하게 들어갔다.
"이모~ 저 왔어요?"
"응. 은행 삼촌 왔어?"
"네. 하하하. 어제 장사는 많이 하셨어요? 요즘 경기가 많이 안 좋죠?"
"말로 해야 아나. 죽지 못해 살고 있지"
이성재가 마트 주인으로 보이는 50대 초반의 아주머니에게 반말 비슷하게 말을 걸었다. 성재의 손에는 마트 아주머니가 아침으로 먹으려고 놔둔 빵조각을 들려 있었다. 대화하면서 손에 있는 빵은 자연스럽게 그의 입으로 들어갔다. 고객과 은행원이 아니라 진짜 이모를 대하는 모습처럼 보였다.
"형님은 어디 가셨데요? 안보이시네?"
"아이고 그 인간 말도 하지 말어. 어젯밤에도 밤낚시 갔다가 새벽에 들어와 지금까지 잠자고 있어. 아이고 속 터져. 일보다 낚시에 미쳐서 사니 저 인간을 어쩌면 좋아. 용왕님 계시면 잡아가기나 하지 잡아가지도 않고 꼴 보기 싫어 죽겠네. 아이고 저 화상~"
"이모. 뭔 말을 그렇게 하세요~ 형님도 스트레스 풀고 살아야지~ 하하하"
"아이고 스트레스 풀다가 집안 말아먹겠네. 물때만 됐다 하면 낚시 가방 메고 나가는디 뭔 스트레스여 스트레스가~~~"
"그런가요? 킥킥킥"
능청스럽게 대화를 하면서 이선재가 카운터 안으로 들어갔다. 선반 위를 뒤지더니 돈이 들어있는 통장을 꺼냈다. 이거는 주인인지 손님인지 은행원이지 구분이 되지 않을 정도로 너무 자연스러웠다. 통장의 돈을 능수능란하게 세기 시작했다. 이성재가 처음 보여 줬던 생활의 달인에 나올 정도의 스피드였다.
"이모~ 그래도 어제는 매상이 괜찮았네. 하하하"
"응. 삼촌, 어제는 좀 됐어 하하"
"좀이 아니라 많이 구만~"
"그런가? 하하하. 삼촌, 근데 옆에 잘생긴 총각은 누구 당가?"
"아~ 맞다. 내가 깜박했네. 선수 씨. 마트 사장님 한테 인사드려. 여기가 선수 씨 거래처 중 첫 집이야."
"네네. 안녕하십니까? 김선수입니다."
"선수요? 무슨 선수요?"
"네. 제 이름이 선순데요." 선수는 멋쩍게 웃으며 뒷 머리를 긁적였다.
"이모~, 우리 은행 신규직원인데 이름이 선수야 선수! 하하하. 이름 재밌지? 잊어먹진 않을 거야"
"응. 그러네 삼촌. 아따~ 해피 은행에 키도 크고 잘생긴 삼촌이 들어왔네. 하하하"
'왐마~ 이모! 그러면 나는 안 잘생겼다고?"
"성재 삼촌이 잘생긴 거는 아니제. 킥킥킥"
"이 정도면 잘생겼지 뭣이 아니여? 아따~ 이모 참 사람 보는 눈 없네잉. 나 그러믄 삐지요~ "
"알았어, 알았어. 삼촌은 훈남이여 훈남. 킥킥킥"
마트 여사장의 사투리에 맞춰 걸쭉한 시골 말을 구사하는 이성재 대리였다. 둘의 대화에서 가족 같은 친근함이 묻어났다.
"이모, 우리 다음 코스 가야 하니까 그만 가 볼게요. 수고하세요!"
"응. 그래. 성재 삼촌 고생해. 내일 보게. 새로 온 삼촌도 낼 봐요~"
"네, 네...... "
선수는 얼떨결에 대답했고 이성재의 뒤꽁무니를 따라 마트 밖으로 나왔다. 나오면서 이성재는 빵을 하나 입에 넣고 오물거렸다. 그는 하나를 더 집어 선수의 입에도 넣어 주었다.
"선수 씨~ 잘 봤어?"
"네, 네......"
빵을 씹으며 급하게 대답했다.
"내가 고객님 대하는 게 어떤 거 같아?"
"되게 친해 보이시던데요?"
"그래? 그럼 잘 봤어. 우리는 은행원이기도 하지만 우리 은행의 조합원 들과는 친구처럼, 가족처럼 대하는 게 중요해 이분들은 단순히 돈만 입금하는 게 아니야 일하면서 겪는 힘든 이야기도 들어줘야 하고, 좋은 일 있으면 축하도 해줘야 하는 게 우리의 일 중 하나야. 그러다 보면 선수 씨한테 거래처도 더 들려주고 공제(보험)도 들어주고 하는 거야. 이게 처음에는 어색할 수 있지만 하다 보면 적응될 거야."
"네. 알겠습니다."
"내가 은행원인갑네 하는 그런 폼은 다 잊어버려. 우리가 깔끔하게 정장 입고 다니지만 저 작은 오토바이 타고 거래처들을 다닐 때는 다 같은 상인들이야 잘 알겠어?"
"네. 대리님."
"어쩔 땐 이분들 고민이나 인생 상담을 해줄 때도 있을 거야. 그만큼 되려면 시간도 흘러야 하고 정도 많이 나눠야 되겠지. 나도 처음에 이 일을 시작할 때는 많이 힘들었어. 지금 자네가 무슨 생각하는 줄 알아. 조금 부끄러울 수도 있을 거고. 은행이라고 해서 시원한 사무실에서 깔끔한 정장 입고 일할 줄 알았는데 자장면 배달도 아니고 오토바이 타고 다니니까 말이야, 자네 속을 내가 다 알지? 나도 똑같은 생각 했거든. 하하하. 지금이야 날씨가 선선하니 좋지만 한 여름에 뙤약볕 맞고, 겨울에는 눈 맞으며 다녀봐 얼마나 처량 한지 하하하.
"........"
"그런데 내가 왜 이렇게 재밌게 다니는 줄 알아?"
"글쎄요."
"선수 씨는 아직은 잘 모르겠지. 아까 내가 빵 집어 먹으며 그 여자 사장님과 남편 낚시 이야기까지 하면서 편하게 대화하는 거 들었지? 이 일은 힘들지만 정이 있는 일이야. 정을 나누다 보면 고객님들이 한 명 한 명이 누나 같고 형님 같고 동생 같아져, 나중에 시간이 지나면 자네도 내 말을 이해할 때가 올 거야. 그때는 이 일이 그냥 돈 수금하는 게 아니라 나름 보람된 일이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될 거야"
"네. 잘 알겠습니다. 저도 빨리 대리님처럼 그런 날이 오면 좋겠네요. 하하"
방금 전 카운터의 빵을 맘대로 집어먹던 이성재 대리가 또다시 멋지게 보였다. 헤어젤을 발라 올백으로 넘겨 반들반들 윤이나는 그의 머리에서 윤이 아니라 후광이 나는 것처럼 선수의 눈에는 비쳤다.
"자~ 다음 코스로 가볼까"
"네. 대리님!"
이성재가 장황한 설명을 끝내고 오토바이에 올라탔다. 한 손에 들고 있는 검은 가방을 오토바이 핸들과 무릎 사이에 끼우며 시동을 걸었다. 옆에서 바라보던 선수도 똑같이 가방을 무릎 사이로 끼우며 시동을 걸었다.
둘은 스트롤을 당기며 오토바이를 출발시켰다.
'부르릉~ 부르릉~' 5월의 봄바람이 시원하게 그들을 맞이했다. 몇 분 타더니 이선재가 브레이크를 또 잡았다. 선수도 따라서 오토바이를 멈췄다. 이성재 가 광이 나는 구두로 오토바이 받침을 '착~'세우고 내렸다. 자신 있게 내리며 왼손에는 여김 없이 가방이 들려있고 핸들에 붙어있는 작은 거울로 얼굴을 한번 봤다. '음~ 됐어' 하는 표정으로 어깨를 가볍게 돌렸다. 뒤에 있는 선수를 보더니 앞에 있는 정형외과 병원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따라오라는 표정이었다.
'선수 씨! 두 번째 코스야~ 이번에도 잘 볼 수 있도록. 하하하"
"네. 알겠습니다. 이대리님"
서부 영화의 총잡이가 멋진 카우보이 모자를 쓰고 바(bar)의 양쪽문을 열고 당당하게 들어가듯 정형외과의 현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안녕하십니까? 하하하. 사무장님 안녕하세요? 수간호님도 계시네. 안녕하세요?"
"네. 이대리님. 오셨어요?"
"네."
이성재가 카운터 옆의 사무실로 자연스럽게 들어갔다. 선수도 멋진 카우보이의 조수처럼 그의 발자국을 뒤따라 조심스럽게 들어갔다. 여자 간호사들이 저 사람은 누구지 하는 시선으로 그를 쳐다봤다. 이성재는 항상 혼자 왔기 때문에 키 크고 훤칠한 선수의 등장은 호기심을 사기에 충분했다.
"사무장님! 잘 계셨죠? 저희 은행의 신입직원입니다. 내일부터는 여기 김선수 씨가 저를 대신해서 다닐 겁니다. 저는 다른 코스로 옮기구요"
"아~ 그러시군요. 이제 못 봬게 돼서 서운한데요?"
"그러게요. 가끔 차 한잔 마시러 들리겠습니다. 하하"
"네. 네 그러세요. 새로 오신 직원분 반갑습니다."
"네. 네."
사무장이 선수에게 인사를 하면 악수를 건넸다.
"김선수 씨요? 이름이 특이하네요. 하하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아니, 제가 잘 부탁드립니다."
선수가 얼떨결에 대답했다.
"사무장님 요즘 의료수가와 건강보험 관련해서 많이 복잡하던데요. 병원 운영하는 입장에서 많이 피곤하시겠습니다."
"네. 알고 계셨네요. 안 그래도 요즘 원장님이랑 매일 그거 관련해서 회의만 합니다. 머리가 아프네요"
"그럴 거 같습니다. 뉴스 보니 많이 심각한 거 같더라구요"
"그러게요. "
"그래도 정부에서 좋은 쪽으로 하지 않을까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하하하"
이선재는 사무장과의 대화를 젠틀하게 마무리했다.
대화를 끝내며 서랍에 최무장이 건네는 지폐 뭉치를 건네받고 옆 탁자에 앉아 돈을 세기 시작했다. 집중해서 세는 모습이 마트에서 빵을 오물거리며 마트 여사장과 대화할 때와는 180도 다른 모습이었다.
돈을 세고 pda에 입금처리를 하고 사무장과 인사를 한 후 사무실에서 나왔다. 선수도 뒤따라 나오며 꾸뻑 인사를 했다.
"간호사 님들~"
"네~"
"네!"
이선재 대리가 카운터 쪽으로 걸어오며 큰소리로 간호사들에게 인사를 했다. 네다섯 명으로 보이는 간호사들이 합창을 하듯 같이 대답을 했다.
"여기 우리 저축은행 신규직원 김선수 씨예요. 내일부터 선수 씨가 저 대신 다닐 거니까 잘 좀 부탁드립니다. 우리 선수 씨 키도 크고 잘생겼죠? 나보다 조금 못나지만 하하하. 지금 총각에 여자 친구도 없다니까 혹시나 맘 있으신 분들은 저한테 신고하세요. 킥킥킥"
이선재가 당당하게 소리쳤다. 순간 선수의 얼굴이 빨개졌다.
수간호사로 보이는 가장 나이 많아 보이는 간호사가 능글능글한 웃음을 지으며 얘기했다.
"어머~ 어머~ 진짜 여자 친구 없어요? 호호호"
"아니, 수간호사님이 왜 침을 흘려. 간 사람은 침 흘리면 안 되지? 킥킥"
'뭘, 제가 침 흘렸다고 그래요. 우리 직원들 소개해 줄까 해서 그러지. 아 그리고 침은 좀 흘리면 안되나. 잡아먹을 것도 아닌데"
수간호사가 능글맞게 웃으며 말했다.
"그럼 침만 흘려. 다른 건 하지 말고. 순수한 남자니까. 킥킥킥"
선재가 재밌다는 듯 농담을 받아치며 병원을 나왔다. 선수는 쑥스러워 말 한마디 못하고 고개만 연신 숙이며 선재 뒤를 따라 출입구로 나갔다.
"선수 씨 잘 봤지?"
"네"
"여기는 분위기가 어때?'
"대리님이 더 멋있어 보이는데요"
"그래? 킥킥킥 어떻게?"
"네. 아까는 동네 아저씨 같더니. 병원에서 사무장과 업무 볼 때는 정말 젠틀하시던데요 하하하. 놀랬습니다. 아 진짜 멋졌습니다."
"역시. 선수 씨 사회생활 잘해 킥킥킥. 그거야. 우리는 다양한 사람들하고 만나니까 그분들에게 맞춰야 해. 자영업자라고 해서 시장에서 일하는 사람만 만나는 게 아니야. 병원 원장님들이나 건설회사 사장님들도 만나서 업무 얘기를 할 수 있어. 대부분은 첫 고객님들처럼 그런 분들이 많지만, 꼭 그런 상황만 아니니까 거기에 맞춰 조합원들 관리를 잘해야 해. 알았지?"
"네. 무슨 말씀인지 잘 알겠습니다. 이런저런 상식도 많이 있어야겠네요"
"그렇지, 그거야. 동네 구멍가게라고 하더라도 절대 무시하는 행동이나 말하면 안 돼 알았지?"
"네. 잘 알겠습니다. 이대리님이 너무 멋지십니다. 하하 존경스럽습니다. "
"그래? 내가 좀 멋지지? 킥킥킥"
선재가 웃으며 농담을 받아쳤다.
둘은 두 번째 코스를 돌고 또다시 오토바이에 올라타 시동을 걸었다. 정신없이 70~80여 군데가 되는 곳을 돌았다. 선수는 마냥 신기하기만 했다. 살면서 하루에 그렇게 많은 가게를 들어가 본 것도 처음이었다.
마트, 병원, 미용실, 쌀가게 등등 그전에는 한 번도 관심 있게 생각하지 않았던 많은 사람들의 사는 모습을 한 번에 볼 수 있다는 게 신기하기도 하고 재밌기도 했다.
신기함도 잠시 당장 내일부터는 이성재 대리가 없이 혼자 다녀야 한다는 마음에 걱정이 앞서기 시작했다.
이성재 대리가 업무 하면서 모르면 전화로 물어보라고 했지만 그걸로 그의 긴장된 마음은 가라앉지 않았다.
'내일부터는 어떻게 돌지.....' 선수의 입에서는 걱정 섞인 혼잣말이 흘러나왔다.
다음 8회에 계속됩니다. (월, 금요일 주 2회 올릴 계획입니다. 바쁘면 못 지킬 수도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