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하는 직장인과 집으로 가는 학생들로 분주한 버스를 타고 집으로 향했다. 버스 안의 사람들이 은행 유니폼을 입고 있는 은영을 신기한 듯 쳐다봤다. 하지만 은영은 그들의 시선에 아무 거리낌이 없었다. 본인은 그런 모습이 몸에 배어 있는 듯했다. 물에 젖은 스펀지 같이 피곤한 몸을 이끌고 집에 도착했다. 현관문에 달린 번호키를 누르고 집으로 들어갔다.
현관에는 다른 집에서 볼 수 없는 빳빳하게 다려진 멋진 교도관 정복이 걸려있었다. 그 옷은 은영의 아버지 옷이었다. 은영의 아버지는 교도관이다.
은영과 그의 언니, 여자 둘이 살고 있는 집이라 은영의 아버지가 혹시 몰라 걸어둔 교도관 정복이었다. 아무것도 아닌 거 같지만 각 잡힌 정복에 아버지의 애정이 묻어 있었다.
20대 후반의 언니는 동사무소 행정직 공무원이다. 가을이면 남자 친구와 결혼식을 올릴 계획을 가지고 있다.
은영은 해피 저축은행을 찾아오는 손님들을 하나하나 응대하고 수없이 많은 돈을 계산하느라 몸이 피곤했지만 집에 와서 할 일이 있다는 것을 생각하자 이상하게 힘이 솟는 듯했다. 그 할 일이란 지금까지는 한 번도 해보지 않은 것이었다.
뭐가 급한지 은영은 은행 유니폼을 갈아입지도 않은 채 언니의 방으로 들어가 파란색 손잡이가 달린 옷장을 열었다. 옷을 좋아하는 언니답게 옷장에는 화려한 옷들이 색깔별로 걸려 있었다.
화창한 봄날 청보리밭의 파란 이파리를 쓸 듯 한 손으로 옷장 속의 옷들을 스르륵스르륵 어루만졌다.
순간 피곤이 찌든 은영의 얼굴에 미소가 머금었다.
지금까지 은영은 옷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버스에서 보았듯 출퇴근 시에도 회사 유니폼을 입고 다녔다. 그런 그녀가 언니의 예쁜 옷들 앞에서 미소를 짓고 있는 게 조금은 낯설었다.
무얼 입어볼까 망설였다. 가슴이 움푹 파이고 치마 길이도 짧은 가장 화려하게 보이는 원피스를 집어 들었다.
방 한쪽의 전신 거울에 대보았다. 그녀의 몽실몽실하게 자른 단발머리와는 어울리지 않았다.
차근차근 옷장 속 옷들을 꺼내 거울 앞에서 대보았다. 그중에는 자기와 어울릴 거 같은 옷들도 몇 개가 보였다. 유니폼을 벗고 하나씩 입어봤다. 어울리는 것도 있고 아닌 것도 있고 그렇게 하는 것으로도 기분이 좋았다. 가슴 한켠에서는 선수의 얼굴이 떠올랐다. 화장기 없이 순박해 보이는 은영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하루 종일 은행일에 시달리며 힘들었던 피로는 어디로 갔는지 전혀 피곤해 보이지 않았다.
자신도 그렇게 기분이 갑자기 바뀔 수 있다는 것이 무척 신기했다. 흥얼흥얼 거리기까지 하며 언니의 옷들을 입어보고 있었다.
'띠~ 띠띠! 띠 디딕! 철컥~'
현관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은영의 언니 효경이 퇴근하고 온 듯했다. 현관에서 신발을 벗던 효경은 집안의 분위기가 평상시와는 다르다는 걸 느꼈다.
퇴근하고 집에 돌아오면 거실 소파에서 반 시체 상태로 널브러져 티브이를 켠 후 스마트폰에 얼굴을 처박고 있어야 할 은영이 보이지 않았고, 거실에 울리고 있어야 할 티브이의 아이돌 노랫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대신 자신의 방에서 불빛이 비쳤고 무언가를 뒤적이는 사람 소리가 들렸다.
효경은 순간 긴장이 됐다. 거실에 걸린 교도관 정복이 항상 든든하게 보였는데 생소한 분위기 때문인지 그날만큼은 그렇지가 못했다.
부스럭 거리는 소리가 나는 자신의 방 쪽으로 한 발짝 한 발짝 걸음을 옮겼다. 조심스럽게 내 딧는 발걸음에도 긴장이 묻어났다. 조금 무섭기도 했다. 옆에 들고 있던 핸드백을 가슴에 꼭 움켜 진체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은영의 신발은 보였는데 은영의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는 게 동생이 잘못된 건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순간 덜컥 겁이 났다.
살짝 열린 방 안에서 나는 부스럭 거리는 소리는 가까이 갈수록 더욱 선명하게 들렸다. 핸드백 속의 스마트 폰을 꺼내 패턴을 풀었다. 남자 친구의 단축 번호를 눌렀다. 신호음이 울림과 동시에 틈이 벌어져 있는 문을 한 손으로 살짝 밀었다.
'헉~'
효경의 입에서 나오는 소리였다.
차라리 도둑이었다면 그렇게 놀라지 않았을 거였다.
은영이 입고 있던 은행 유니폼을 벗어둔 채 옷장 속에 있는 자신의 옷들을 꺼내 입으며 패션쇼를 했는지 쌩쑈를 했는지 방안이 널브러진 옷으로 난장판이었다.
효경의 입에서는 바로 고함이 나왔다.
"야!~~~ 조은영!!! 너 미쳤지! 지금 뭐 하는 거야!!!"
그녀의 비명에 가까운 고함 소리는 방을 타고 현관을 넘어 아파트 전체에 울려 퍼지는 듯했다.
널브러진 옷들을 보자 효경의 피가 거꾸로 솟았다. 효경은 옷을 자신의 목숨처럼 여겼다.
돈만 생기면 하나씩 하나씩 사모은 옷들이 방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걸 보자 쓰러질 듯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아~ 언니 왔어?"
"뭐~ 언니 왔어? 그래~ 왔다! 왔어!!! 야~ 이게 뭐야? 누구 맘대로 이렇게 난장판을 만들어 놨어? 네가 죽고 싶어 환장을 했구나!!!"
"옷 좀 입어본 거 가지고 이렇게 소리 지를 거 까지는 없잖아?"
"뭐? 옷 좀 입어본 거? 야~ 이 가시네야 이게 옷 좀 입어본 거야? 아주 난리를 쳐놨네. 너, 내가 옷을 얼마나 애지중지 하는지 알아? 몰라? 너 진짜 죽고 싶어?"
"알지만 내가 옷 좀 입어봤다고 이게 다 못쓰는 것도 아니잖아. 뭘 그러게 난리야?"
"못쓰는게 아니라고? 야~ 이 가시나요? 못쓰는 거다! 못쓰는 거!"
효경이 소리를 지르며 들고 있던 핸드팬을 은영의 얼굴로 냅다 던졌다. 은영은 고개를 돌렸다. 꿍하며 뒤통수에 충격이 느껴졌다. 자신이 난리는 아닐지라도 옷을 만진건 사실이라 머리가 아팠지만 뭐라고 변명할 거리가 생각나지 않았다.
"정리해 놓으면 되잖아~ 진짜! 옷 좀 입어 본 거 가지고 난리네 난리. 남자 친구 만날 때는 무슨 요조숙녀 인척 하더니, 남친이 이렇게 성질 더러운 거 알려나 몰라. 참나~"
"야! 이 가시네야~ 내 남친은 너 같은 또라이 아니거든? 나를 돌아버리게 만들지도 않고. 이게 미쳤나, 진짜!"
"알았어~ 미안해~. 정리해 놓으면 되잖아."
더 말해봤자 언니 성질만 돋울걸 같아 은영이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핸드백에 뒤통수를 맡고 짜증이 난 건 어쩔 수 없었다.
내일 출근할 때 언니 옷을 빌려 입고 가려면 여기까지만 해야 할거 같아 더 이상 많은 말은 하지 않고 바닥에 널린 옷들을 주섬주섬 주워 옷장 속에 넣었다.
"언니~ 미안해~ 내가 다 정리했어. 화 풀어 알았지?"
"됐거든. 정말 너 죽여버리려다 참는 줄 알아! 진짜 너는 동생만 아니었으면 죽었어!"
"언니, 근데 있잖아. 나 부탁이 있는데. 부탁 좀 들어주면 안 돼?"
"응~ 당연히 안돼!!!"
"참나. 부탁 듣지도 않았잖아~"
"응~ 그래. 그래도 안돼!!!"
"말 좀 들어보라고~~~ 어려운 거 아니라고. 옷 좀 빌려 주라고!"
"뭐? 내 옷? 하하하. 아 네. 네. 당연히 안됩니다. 딴 데 가서 알아보세요~ 조은영 씨! 제 옷들은 렌털 해주는 것들이 아닙니다. 네~ 네~ 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