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영이 은영 했네! (3)

해피 저축은행 김선수(효라빠 장편 소설 10회)

by 효라빠

은영은 자신의 책상에 앉아 숨을 고르고 있었다. 사무실까지 어떻게 들어왔는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머리에는 온통 아침 엘리베이터에서 자신을 힐끔힐끔 쳐다보던 여고생의 시선만 떠올랐다.

어디 학교에 다니는 학생인지 모르지만 그 학생이 다니는 학교에서는 오늘 하루 동안 은영의 치마 낀 궁둥이가 토크 탑에 오를 게 확실할 거 같았다. 아니 오늘이 아니라 몇 년이 될지도 모를 거라는 암울한 생각이 들었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건 선수에게 이 끔찍한 상황이 발각되지 않은 거였다. 주차장에서 앞으로 걸어가는 선수에게 말을 걸까 말까 망설이다가 말을 걸지 않고 조용히 있길 잘했다는 생각을 하자 조금씩 마음의 안정이 찾아오는 듯했다.


그 순간 스마트 폰에 카톡이 왔다. 언니 효경이었다.

[제발 정신 좀 차리고 살아라~ 이게 뭐니? 동네 창피하게. 내가 너 때문에 얼굴을 들고 다닐 수가 없다]

[아씨~ 안 그래도 짜증 나는 데, 웬 카톡질이야! --, 언니가 얼굴을 못 들고 다닐 거는 또 뭐야? 내가 궁둥이 깠지? 언니가 깠어?]

[아이고~ 잘나셨어요? 그래, 그래. 니 궁둥이 대단하다! 대단해! 앞으로는 신경 안 쓸려니까 잘해보세요]

[알았으면 일이나 하세요!]

[이봐~ 이봐~ 살려줘도 고마운지 모른다니까. 아까 차에서 괜히 말해줬네. 궁둥이 까고 출근해서 얼굴 쪽팔려 회사생활 못하게 했어야 하는데. ㅋㅋㅋ 아니다. 어쩌면 니 펑퍼짐한 궁둥이 보고 다른 직원들이 회사생활 못할 수도 있었겠다야~ 눈 썩어서ㅎㅎㅎ 너네 저축은행에서 나한테 무슨 감사패라도 줘야 하는 거 아니냐? 은행 직원들 눈 살려 줬다고? ㅋㅋㅋ]

[아씨~~~ 이 망할 언니가 뭐라는 거야? 안 그래도 짜증 나 죽겠는데. 이따 집에서 죽는 수가 있어? 지금 나의 흥분 지수로는 언니라도 안 봐준다?]

[ㅎㅎㅎ 알았으니까, 빌려준 옷이나 잘 입고 오세요. 니 궁둥이 보다 내 옷이 더 걱정돼서 카톡 한 거니까 오해하지 마세요. 옷에다 뭐 묻히기나 하면 앞으로 빌려주는 거 절대 없으니까. 왠지 너 하는 꼴이 뭔가 불안하다. 불안해. 저 덜렁이 언제쯤이나 차분해 질런지......]

[알았으니까 걱정하지 마. 나 일 시작해야 하니까 나랏일 하시는 대단하신 분은 나랏일이나 하세요....]

[그래 알았다. 이 바보야 ㅋㅋㅋ]

현실 자매의 카톡은 볼썽사나운 상황에 대한 안타까운 동생보다는, 동생이 입고 있는 자신의 옷이 안타깝고 무슨 사고가 생기지 않을까 하는 언니의 걱정으로 마무리됐다.


아침 출근할 때 들고 왔던 쇼핑백에서 털 달린 실내화를 꺼냈다. 지금 신기에는 조금 일렀지만 그동안 신고 있었던 투명테이프가 감긴 슬리퍼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고급스러웠다.

슬리퍼를 사려고 다이소에 갔을 때 계절이고 뭐고 간에 가장 고급스럽고 예뻐 보이는 걸 살 생각이었기 때문이었다. 오래된 슬리퍼를 집어넣고 새 실내화를 신자 치마 사건으로 인해 축 쳐져있던 기분이 다시 살아나는 듯했다. 갑자기 자신의 슬리퍼를 자랑하고 싶어졌다.

옆 자리인 장은주가 열심히 돈 계산을 하고 있었다. 은영이 살짝 장은주 옆으로 발을 내밀며 말을 걸었다.

"언니, 저기~ 지우개 좀 빌려줄래?"

"응. 그래. 여깄어"

"네~ 고마워요~"

"어~ 은영야! 웬일이래? 네 슬리퍼가 바뀌었다. 투명 테이프 감긴 거는 어디로 보내고 새로 장만했네. 야~ 근검절약의 대명사인 조은영 씨가 무슨 일이야? 아침부터 화사한 투피스 정장을 입고 출근을 하지 않나, 그렇게 버리라고 말해도 자기 갈 길 가겠다는 듯 말도 듣지 않던 짠돌이 조은영 씨가 이렇게 고급진 슬리퍼를 신고 오다니 하하하"

"언니~ 제가 안 꾸며서 그러지 저도 신경 쓰면 어디 가서 빠지진 않아요. 헤헤"

그들 옆으로 휴지통을 들고 지나가던 이성재 대리가 대화를 듣고 끼어들었다.

토실토실 살이 오른 얼굴에 통통한 몸집을 건들건들 거리며 무슨 신나는 이야깃거리가 생긴 것 마냥 웃으며 조은영의 실내화를 쳐다보며 말했다.

"와~ 은영 씨~ 쓰레빠 멋지네 하하"

"이대리님 쓰레빠라니요~ 실내화죠. 이런 럭셔리 애한테 그렇게 말하면 이 아이가 얼마나 서운해하겠어요~"

"그런가~ 그래. 그래. 실내화 아주 멋지네. 근데 그거 신고 다니다가 조만간 발에 땀띠 나는 거 아냐?"

"땀띠요?"

"그래~ 그거 지금 신기에는 조금 과한 거 아냐? 하하하"

성재의 갑작스러운 말에 은영의 말문이 막혔다. 말을 더듬거리며 한마디 했다.

"아... 저는 땀이 별로 없어서......"

"아~ 그래? 그럼 다행이고 킥킥킥"

사무실의 직원들이 다 들을 정도로 이성재가 웃으며 말했다.

은영은 무조건 고급스러운 걸 고른다는 생각에 지금이 5월의 봄이고 다음 계절은 겨울이 아니라 여름이 온다는 걸 그제야 생각이 들었다. 뭐 어떻게든 신어지겠지 하는 생각을 하며 짧게 대답을 했다.

5월의 사무실에서 흔하게 들리지 않을 '땀띠'라를 말에 고개를 책상에 숙이고 외근 준비에 열중하고 있던 선수도 은영과 이성재 대리가 대화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사막의 모래 구덩이에서 아기 미어캣이 머리를 쑥 빼내 두리번거리며 엄마를 기다리는 듯, 손에는 돈다발이 들려있고 엉덩이는 의자에 절반만 걸친 채 고개를 쑥 빼고 있었다. 긴장된 모습이 신입사원 다웠다.

"은영아 그거 얼마 주고 샀어? 비싸 보이는데? 나도 겨울에 하나 사서 신어야겠다."

"이거요? 비밀이에요. 하하하"

가격을 물어보는 장은주의 질문에 은영이 얼버무렸다.

"그렇게 비싸게 보이진 않아 보이고만. 어디서 샀는데?"

"다이소요......"

"다이소면 뭐 얼마 하지도 않겠네"

"언니~ 가격이 중요한 게 아니라 내가 신으니까 멋지게 보이는 게 중요한 거지. 하하하"

은영과 장은주의 대화에 선수가 쑥빼낸 고개로 은영의 실내화를 쳐다봤다.

은영도 선수가 자신의 실내화를 보고 있는 것을 눈치챘다. 은영이 고개를 돌리자 선수와 눈이 마주쳤다. 은영은 아무 말도 못 하고 바로 고개를 돌려버렸다. 선수도 특별한 말을 하지 않고 하던 일을 계속하기 시작했다. 선수가 이쁘다거나, 고급스럽다거나 어떤 말이라도 할 줄 알았는데 별 관심이 없는 거 같아 조금 아쉬웠다.

은영은 실내화를 신고 탕비실에 가기 위해 일어섰다.

출근 시간에 있었던 치마 사건의 긴장이 다소 풀리자 달달한 믹스커피 생각이 났다. 어쩌면 탕비실로 가려면 선수의 책상 뒤로 가야 했기에 달달한 믹스커피가 더 생각이 났는지도 몰랐다. 그렇다고 선수에게 말을 걸거나 할 자신은 없었다. 선수가 말이라도 걸면 어쩌지 하는 긴장감이 더 크게 다가왔다. 선수는 열심히 외근 준비를 하고 있었고 은영은 그 뒤를 새로 산 털 달린 실내화를 신고 사뿐사뿐 걸었다.

종이컵에 믹스커피를 넣고 뜨거운 물을 부어 젖고 있는데 선수도 한잔 타 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그럴 자신은 없었다.

커피를 들고나가려는데 선수가 탕비실로 들어왔다. 은영의 온 신경은 선수에게로 쏠렸다. 그녀의 심장이 콩닥콩닥 뛰었다. 자신의 콩닥거리는 심장 뛰는 소리가 들키지 않게 최대한 차분하게 커피를 저었다. 선수도 믹스 커피를 마시려는 듯했다. 그가 커피를 타며 은영에게 말을 걸었다.


"저기, 은영 씨~"

"네! 네?"

"혹시~ 이만......"

"네? 이만 이요?"

"네. 이만......"

"이만... 이라니, 뭐가요? 이만 만나요?"

"아니 만난 적도 없는데 뭘 이만 만나요. 킥킥. 그게 아니라 아까 장은주 씨랑 가격 얘기하던데 실내화 2만 원 주고 산거 맞죠?"

선수의 갑작스러운 실내화 가격 얘기에 은영은 당황했다. 몇 초도 되지 않는 짧은 순간에 그녀의 머릿속에서는 수만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아니, 내가 2만 원에 산걸 어떻게 알았지? 혹시 선수 씨가 내 마음을 읽은 건가? 우리가 텔레파시가 통한 건가? 그럼 선수 씨와 나는 인연인가!'

은영이 혼자만의 생각에 얼굴이 붉어졌다. 달달한 믹스커피가 더 달달하게 느껴졌다. 그 달달함에는 선수의 마음이 들어가 있지 않나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아니, 선수 씨가 그럴 어떻게 아세요? 우와~ 제 마음을 읽은 거예요? 아니다 저랑 텔레파시가 통한 거죠?"

"네? 아니. 그게 아니라......"

갑자기 은영의 놀라움에 선수가 당황해서 바로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와~ 진짜 신기하다. 어떻게 선수 씨랑 저랑 이렇게 마음이 통할수가 있죠. 대박 신기하다. 호호호"

"저기.... 저... 저...."

"선수 씨도 바로 대답을 못하는 게 그렇게 생각하는 가 봐요?"

은영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지만 그 속에서는 경의로움이 들어가 있는 듯했다. 은영의 쌍꺼풀 없는 눈은 부풀대로 부풀어 있고 그녀의 입꼬리는 귀에 걸릴 지경이었다.

그녀의 흥분된 대답에 선수가 말을 얼버무리며 가깠으로 대답을 했다.

"아니.... 그게 아니라요...."

"그게 아니긴 뭐가 아니에요. 그런 게 아니면 선수 씨가 어떻게 신발 가격을 알아요? 점쟁이도 아니고 호호호"

"네. 저는 점쟁이가 아니니까요."

"그러니까. 마음이 통한 게 맞죠. 호호"

"은영 씨랑 통한 게 아니라 아니라 실내화랑 통했나 보죠. 하하"

"네? 실내화랑 마음이 통했다구요?"

"아~ 실내화 발바닥에 뭐가 붙어 있던데요"

"네?"

"은영 씨 걸어 다니는데 실내화 발바닥에 뭐가 붙어있길래 뭔가 했더니 가격표 같던데요. 2만 원 맞죠? 킥킥킥"

"네? 네..... 맞게 보셨네요...."

"텔레파시는 없는 걸로 하시죠 킥킥킥"

"아~ 네...."

선수가 웃으며 말했다. 은영의 얼굴이 후끈 달아올랐다. 텔레파시 어쩌고 저쩌고 했던 자신의 입을 밧줄로 꽁꽁 묶어 버리고 싶었다.

손에 들고 있는 믹스커피가 차라리 사약이라면 벌컥벌컥 마셔버리고 싶을 만큼 부끄러웠다. 은영은 아무 말없이 탕비실에서 나왔다. 그녀의 머릿속은 백지상태가 되어 버렸다. 자신의 자리로 빠른 걸음으로 걸었다. 빨리 끔찍한 탕비실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퍽'

"악~~~"

퍽 소리와 함께 은영의 입에서 외마디 비명이 흘러나왔다. 급하게 걸어가다. 불룩 튀어나와 있는 이성재 대리의 책상 모서리에 부딪쳤다.

"어~ 은영 씨 왜 그래? 아침부터 책상이 말을 안 들어? 왜 책상을 때리고 그래?"

"아니에요. 이대리님"

"그러다 책상 다쳐~ 킥킥"

이성재 대리는 은영의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책상에 부딪친 은영을 걱정하는 게 아니라 은영과 부딪친 책상의 모서리를 걱정하듯 농담을 했다.

그녀의 머리 속은 하얀 백지상태가 되었다. 허벅지에서는 불이나고 출근길부터 치마는 팬티스타킹에 들어가 있고 어른들이 말하는 삼재가 오늘을 말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의 자리로 돌아와 주변을 힐끗힐끗 돌아보면 실내화를 집어 들었다. 바쁜 시간이라 모두 자기 일에 열중하고 있었다. 다행히 아무도 은영의 행동에 관심을 갖지 않았다.

은영이 말없이 실내화 바닥에 붙어있는 '20,000'이라는 스티를 띠며 중얼거렸다.

'내가 두 번 다시 다이소를 가나 봐라......'


선수는 탕비실에서 믹스커피를 마시고 있는데 '퍽!' 소리와 함께 책상 모서리에 부딪쳐 절뚝거리며 걸어가는 은영의 뒷모습이 보이자 히죽히죽 웃음이 나왔다.

'은영 씨 은근히 재밌네~ 킥킥킥' 혼잣말을 하며 검은 가방을 들고 외근 나갈 채비를 했다.


다음 11회에 계속됩니다. (월, 금요일 주 2회 올릴 계획입니다. 바쁘면 못 지킬 수도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