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굴 본 지도 20년이 지난 하나밖에 없는 금쪽같은 딸에게서 교통사고가 나 돈이 급하다는 문자를 받자 최노인의 머릿속은 하얗게 백지상태가 되는 듯했다.
어떻게 해야 할지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정신부터 차리고 일단 딸의 목소리를 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자가 찍힌 번호의 통화버튼을 눌렀다.
[아빠~ 저예요! 저 지금 교통사고가 나서 병원이에요. 돈이 급하니까. 통장에 있는 돈 좀 찾아 놓으세요]
[뭐? 혜숙이라고?]
[네. 저 혜숙이예요. 아빠 지금 제가 다쳐서 말을 많이 할 수가 없어요. 돈을 찾아서 집에 가져다 놓으면 제가 아는 사람을 보내서 찾으러 갈게요. 돈은 현금으로 찾아주세요. 돈을 병원비와 생활비로 쓰려면 수표는 불편해요]
[응, 그래. 그래. 알았다. 현금으로 찾아 놓을게. 혹시 많이 다친 건 아니냐?]
[많이 다 치친 않았어요. 목숨이 위험한 건 아니니 너무 걱정은 안 하셔도 될 거 같아요. 제가 진료받아야 하니 이만 끊을게요. 아빠 다시 전화할게요.]
[응. 그래. 알았다~ 알았다~]
딸이라는 여자는 돈이 필요하는 말만 하고 전화를 끊었다. 말투와 억양이 약간 어색했지만 오랫동안 미국 생활 중인 딸이라 최노인은 크게 의심하지 않았다. 오랜만의 전화 통화에 교통사고가 났다는 게 많이 걱정됐지만 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어서 한편으로 반갑기도 했다.
'아이고, 우리 금쪽같은 혜숙이가 큰일 났네. 으째야 쓰까~ 빨리 돈을 찾아놔야 쓰겠다. 멀리 살아서 얼굴도 못 봤는데 우리 혜숙이 불쌍해서 어쩐데......'
최노인이 혼잣말을 하며 방 안에서 우왕좌왕 발만 동동 굴렀다.
'그래. 그래. 혜숙이 말대로 빨리 돈을 찾아놔야겠다.'
최노인은 장롱 속 이불을 들췄다. 그 속에는 해피 저축은행 예금 통장이 몇 개 들어 있었다. 매일 이성재 대리에게 5,000원씩 입금했던 통장과 그동안 모아놨던 돈이 들어있는 통장이었다.
통장들의 돈을 전부 합해보니 6천만 원 정도 되는 듯했다.
최노인은 서둘러 옷을 입었다. 통장을 낡은 가방에 넣고 가게 앞에 놓인 오래된 자전거에 올랐다. 강아지 메리도 자전거 옆에서 주인을 따라가고 싶은지 '왈~ 왈~'거리며 짖고 있었다.
'메리야~ 너는 가게 지키고 있어라. 나 혼자 빨리 다녀올게. 알았지? 지금 너무 급하니까 다음에 같이 가자~'
최노인이 자전거에서 내려 메리를 안아 가게 안으로 넣고 새시 문을 닫았다. 강아지는 혼자 남는 게 서러웠는지 문에 매달려 '왈왈~' 거리며 계속 짖어 댔다.
오래된 자전거의 페달을 급히 밟으며 해피 저축은행으로 달렸다. 딸의 다쳤다는 말에 긴장이 되어 핸들을 잡은 손이 떨려왔다. 해피 저축은행은 멀지 않은 거리라 금방 도착했다.
은행 문을 열고 들어가자 최노인의 등장에 직원들이 긴장을 했다. 선수의 일로 전화를 받은 지 몇 시간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아직까지 무슨 문제가 있나 하고 생각을 했다.
정태섭 과장이 긴장된 채로 최노인에게 인사를 건넸다.
"어르신 혹시 김선수 씨가 아직 안 들렸습니까? 제가 전화로 다시 들리라고 말했는데요....."
"아니, 그게 아니라 내가 일 좀 보려고 왔네. 아까 젊은 직원 하고는 일 다 봤네. 정 과장은 일 보소 나 여기 아가씨랑 일 좀 볼라네....."
"네. 어르신"
정태섭 과장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순간 선수가 일처리를 제대로 수습하지 못해 사무실까지 다시 찾아온 줄 알았다.
최노인은 긴장된 채로 조은영의 데스크 앞에 앉아 몇 개의 통장을 건넸다.
"어이~ 아가씨~ 여기 돈 좀 찾아주소~"
"네. 얼마나 찾아드릴까요?"
"응. 전부 다 찾아줄랑가~"
"전부 다요?"
"응. 전부다~ 아 그라고 현찰로 전부 줬으면 좋겄는디?"
"전부 현금으로요? 급히 쓰실 곳이 있나 보네요?"
"많이 알 것 없고 빨리 돈이나 찾아주소~ 나 지금 급하네...."
"네......"
은영은 통장에 예금된 모든 돈을 찾는 최노인의 행동이 궁금했지만 그의 꼬장꼬장한 성질을 알기 때문에 더 이상 다른 말은 하지 않고 계좌의 모든 돈을 찾았다.
전부 합하니 6,350만 원이었다. 꽤 큰돈이었다.
"어르신 현금은 부피가 클 텐데 수표로 해드리면 어떨까요?"
"아따~ 아까 내가 말하지 않던가? 현찰로 주라면 줄 것이지 뭔 말이 그리 많은가?"
"네. 알겠습니다."
최노인의 짜증 난 말투에 은영의 얼굴이 발개진 채로 현금 뭉치를 데스크 위의 최노인 앞으로 올렸다.
"여기 있습니다. 어디 담으실 곳은 있으세요?"
"그건 내가 알아서 하겄네"
최노인은 짧게 대답을 하고 바닥에 놓여있는 낡은 가방에 현금을 넣었다. 급하게 넣는 모습이 무슨 일이 있는 거처럼 보였다. 무언가 의심스러웠지만 그의 까탈스러운 성격에 물어봤자 좋은 소리를 듣기 힘들 거 같아 은영은 조용히 다른 일은 하는 척했다. 최노인이 서둘러 은행을 나가고 그 상황을 뒤에서 힐끔힐끔 쳐다보던 정태섭 과장이 은영에게 물었다.
"은영 씨 어르신이 무슨 일로 오셨어?"
"네. 본인 계좌에 있는 돈을 전부 찾아가셨어요. 저 할아버지는 진짜 정이 안 가요. 무슨 말을 해도 항상 쌀쌀맞고 왜 성격이 저리 삐뚤어지셨는지, 저러니까 말년에 돌봐주는 사람 하나 없이 저리 불쌍해졌지"
"그러게 말이야."
"이상 한 건 할아버지가 행동이 많이 불안해 보이셨어요. 평소에는 당당하면서 서두르지 않으시던 분이 방금은 안절부절 못하더라구요"
"뒤에서 나도 잠깐잠깐 봤는데 뭔가 행동이 특이하더라고, 돈을 얼마나 찾았어?"
"6,350만 원이요?"
"뭐? 육천 삼백 만원?"
"네....."
"진짜 이상한 일이네. 노인네가 그 많은 돈을 찾아서 어디다 쓰려고 그러지? 참 이상한데...."
"제가 물어봐도. 알 필요 없다고 딱 잘라 말해버리니 더 이상 무슨 말을 물어보기가 그러더라구요"
"응, 그랬겠네. 고생했어."
정태섭 과장은 모든 계좌의 돈을 찾았다는 은영의 말을 듣자 뭔가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전화해서 최노인에게 꼬치꼬치 물어볼 수도 없었다.
은행에서 돈을 찾은 최노인은 자전거를 타고 다시 자신의 쌀가게로 향했다.
전 재산인 돈을 찾아서 인지 자전거의 핸들은 은행으로 출발할 때 보다 더 떨리고 있었다. 자전거를 대충 세우고 새시 문을 열자 메리가 왈왈거리고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최노인을 반겼다.
최노인은 그런 메리를 쳐다볼 경황도 없었다. 서둘러 현금 다발들을 장롱 깊숙이 넣고 초조하게 전화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드르륵 거리며 최노인의 핸드폰 진동이 울렸다.
[여보세요~ ]
[아빠 저예요. 돈은 찾으셨어요?]
[응. 그래, 그래 전부 다 찾았다. 몸은 좀 어떠냐?]
[네. 지금 치료하고 있으니까 너무 걱정 안 하셔도 될 거 같아요. 지금 병원비가 부족해서 돈을 마련하는 게 더 급해요]
[그래. 다행이다. 돈은 어떻게 하면 되겠냐?]
[네. 돈은 제가 친구를 보내서 가져가게 할게요, 아무 데나 놔두면 안 되니까 주방 냉장고 냉동칸에 넣어 두세요]
[응, 응, 알았다. 그렇게 하마]
[제가 지금 치료받아야 하니 다음에 또 전화할게요]
전화통화는 몇 마디의 대화만 하고 바로 끊겼다.
최노인은 가방에 있던 현금을 신문지로 돌돌 말아 시키는 데로 냉장고의 냉동칸에 넣고 문을 닫았다.
선수는 시간이 어떻게 가는지 모르게 거래처를 돌았다. 사무실로 돌아와 자리에 앉았는데 기진맥진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긴장의 연속이었다. 쌀가게에서의 실수로 인해 더욱 힘든 하루였다. 거래처의 현금 수금으로 일이 다 끝난 게 아니었다. 수금한 돈들을 정리하고 시제를 맞추는 가장 중요한 일이 남아있었다.
검은 가방의 지퍼를 열자 막 쑤셔 넣은 지폐와 수표들로 가방 안이 가득 차 있었다. 그 돈들만 정리해도 한 시간은 족히 걸릴 거 같았다.
자기가 빨리 마감을 해야 은행 전체 시제가 마감이 되고 직원들이 퇴근을 할 수 있기 때문에 쉴틈이 없었다. 화장실 가는 척 밖으로 나가 전자담배를 급하게 한 대 피고 바로 자리로 돌아와 업무를 하기 시작했다.
일을 하고 있는데 정태섭 과장과 이성재 대리가 대화를 하고 있었다.
정신없이 일하느라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는데 쌀집 최노인에 관한 말을 하자 귀가 쫑긋 해지면서 신경이 쓰였다. 혹시나 자기가 실수한 일을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해서 긴장이 됐다.
"성재야~"
"네. 정 과장님!"
"아까 낮에 쌀집 최노인이 사무실에 들렸는데. 자기 계좌의 돈을 전부 다 찾아서 갔어."
"네? 쌀집 어르신이요?"
"응, 별일이지?"
"그러게요, 그분을 제가 조금 아는데 그렇게 돈을 한꺼번에 찾을 사람이 아닌데. 이상하네요. 얼마나 찾아갔는데요?"
"응, 은영 씨 말로는 6천만 원이 넘게 찾아갔다고 하던데?"
"네? 6천만 원이요? 이거 진짜 이상한데요? 매일 5천 원씩 하는 사람이 육천 만원이라..... 혹시 무슨 일로 그랬다고 그래요?"
"글쎄, 그건 모르겠어. 물어보니 알 필요 없다는 식으로 말했다고 하던데"
"뭔가 좀 이상하긴 하네요"
"그러지?"
"네."
옆에서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선수가 궁금해서 이성재 대리에게 물었다.
"대리님? 그런데 쌀집 어르신은 원래 혼자 사셨데요?"
"나도 자세히는 모르는데, 다른 가족들은 없고 딸이 하나 있는데 결혼하고 미국으로 이민 가서 사나 봐. 부인하고는 젊어서 사별했고, 성격이 워낙 괄괄해서 누가 친해지려고 하겠어. 나는 매일 다니면서 짧게나마 말 상대도 해주고 했는데, 그 어르신도 혼자 계시다 보니 주변 사람들과 어울리는 걸 잘 못해서 그렇지 알고 보면 그렇게 나쁜 사람은 아냐, 내가 수금하러 가면 커피도 한 잔씩 타 주고 그랬어. 그런데 믹스 커피에 물을 얼마나 많이 넣어서 주는지 하하, 종이컵이 가득 찰듯해 킥킥. 첨엔 이걸 마셔야 하나 했는데 오래 다니며 마시다 보니 배부르고 좋더라고 하하하. 자기 옛날 은행에서 일할 때 얘기 들어주면 목소리에 힘도 나고 그런 어르신인데. 지금은 딸도 외국에 있고 말년에 혼자 저렇게 사는 게 좀 처량해 보이긴 하지"
"네. 그렇군요. 저는 원래 괴팍한 성격인 줄 알았는데 보이는 게 다가 아니네요"
"응, 앞으로 다니면서 친해지면 막 성질만 내고 그러진 않으실 거야. 그건 그렇고 아까 실수했다며? 킥킥킥"
"네. 5,000원을 50,000으로 기입해 난리 났습니다."
"어쩌면 다행일 수도 있어. 만약 쌀집 어르신이 모르고 지나갔거나, 바로 말을 안 해 줬으면 지금 쯤 시제가 안 맞아 돈 이 어디서 비는지 찾느라 퇴근도 못하고 쩔쩔맸을 테니까"
"아~ 그러기도 하네요. 그럼 다행이라 생각해야 하나요?"
"그렇게 생각하는 게 좋을 거야. 하하. 쌀집 어르신도 나름 젊었을 적 은행에서 일해봐서 그렇게 부랴부랴 자네한테 얘기를 했을 수도 있지. 그게 작은 실수 같지만 돈을 다루는 사람에게는 액수가 크고 적고 가 중요한 게 아니라 돈 착오가 있다는 자체로 큰 잘못이 될 수 있으니까."
"네. 이 대리님 말씀 들으니 그 어르신이 화낸 게 이해가 되기도 하네요, 그런데 쌀집 어르신은 돈을 왜 전부 찾았을까요?"
"글쎄~ 모르지. 말 안 하니까 누가 알겠어"
"네....."
서로 현금 정리와 시제를 맞추는 게 바빠서 대화는 짧게 끝났다.
다행히 그날의 시제는 모두 맡았다. 온종일 정신없이 '방구'를 타고 돌아다녔더니 하루가 어떻게 가는지 모르게 퇴근시간이 다 되었다.
해피 저축은행의 모든 직원들은 일을 끝내고 고생하셨다는 인사를 하고 각자 집으로 향했다.
다음 14회에 계속됩니다. (월, 금요일 주 2회 올릴 계획입니다. 바쁘면 못 지킬 수도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