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영, 선수 또 다른 그녀......(6)
효라빠 장편 소설 29회
다음날도 선수는 옷을 쫙 빼입고 출근을 했다.
그는 방구를 타고 미용실 앞을 일부러 두 바퀴나 돌었다. 리에의 동태를 염탐하기 위해서였다.
리에의 모습이 통유리 안에서 살짝 보였다. 심장이 또 콩닥콩닥 뛰기 시작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화사한 목소리의 여자 음성이 여기저기서 쏟아졌다. 카운터의 원장님께 인사를 하고 통장을 받아 들었다. 무덤덤한 척 업무를 마치고 리에를 찾아 고개를 한 바퀴 돌렸다. 그녀는 보이지 않았다. 업무도 마쳤고 밖으로 나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고 있는 찰나 등 뒤에서 그토록 바라던 그녀의 음성이 울려 퍼졌다.
"안녕하세요? 오셨어요?"
"네~ 리에씨. 하하하."
"시원한 거 한잔 드릴까요?"
리에가 웃으며 말했다. 웃는 얼굴의 입술 사이로 하얀 치아가 가지런하게 비췄다. 선수의 얼굴에도 미소가 뗬다.
"그래. 선수 씨 시원한 거 한잔 드려라. 어제는 따뜻한 원두커피에 아주 힘드셨을 텐데. 하하"
갑작스러운 원장의 말에 선수가 뜨거운 커피를 마시고 힘들어했던 걸 들킨 거 같아 뻘쭘했지만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요령 있게 농담으로 받아넘겼다.
"아~ 어제 커피요? 아주 향긋하고 맛있던데요. 킥킥킥"
리에가 냉장고에서 각얼음까지 넣은 시원한 오렌지 주스를 가져왔다.
"더우실 텐데 한잔 드세요!"
"감사합니다. 하하하. 저녁에는 선선한 바람이 불긴 하지만 낮에는 아직 많이 덥네요."
"그런 거 같아요"
리에가 웃으며 대답했다. 원장은 남자 손님 커트를 하러 가고 리에와 선수 단둘이 카운터 앞에 남게 되었다.
선수는 이때다 싶어 살짝 작업성 멘트를 날렸다.
"어제는 잘 들어가셨어요? 친구분 하고 한잔 하셨다고 하던데"
"아~ 어제요? 오랜만에 친구 만나서 수다 좀 떨었어요"
"퇴근은 몇 시에 하세요?"
"8시에 퇴근인데 홀 정리하고 마무리하면 10~20분 지나서 끝나요"
"네. 피곤하시겠네요."
"다리가 아프긴 한데 그런대로 할만해요"
"퇴근하시면 뭐하세요?"
"퇴근하면요?"
"네."
"집에 가죠."
"그러시군나. 제가 얼마 전에 헌혈을 했는데 특별 참여기간이라고 뮤지컬 표를 두 장 주던데. 혹시 뮤지컬 좋아하세요?"
"뮤지컬이요? 저는 아직 한 번도 안 봐봐서..."
"아~ 그러세요? 그럼 잘됐네요. 저랑 뮤지컬 보러 가실래요? 공연장이 여기서 가까워요. 마지막 공연이 9시니까 리에씨 퇴근하시고 가면 딱이겠는데요. 하하. 이번 주 토요일인데 혹시 시간 되세요?"
"뭐~ 딱히 약속이 있는 건 아닌데..."
"그럼 저랑 같이 가시죠. 하하하 제가 리에씨 퇴근시간에 맞춰 올게요. 공연장은 저기 문화예술회관이니까. 여기서 걸어가면 될 거 같아요. 10분 정도 거리니까요"
"음...."
리에가 갑자기 공연 보러 가자는 선수의 말에 바로 대답을 하지 못하고 갈등을 했다. 선수는 아프리카 벌판의 비틀거리는 아기 영양을 노리는 하이에나처럼 고민할 틈을 주지 않고 잽싸게 물었다.
"저랑 같이 가요. 뮤지컬도 처음이라 면서도. 저도 많이 보진 않았는데. 영화와는 또 다른 묘미가 있어요. 배우들이 연기하는 걸 직접 본다는 게 생동감도 있고 정말 재밌어요. 뮤지컬 배우들이 노래를 얼마나 잘하는지 정말 멋있다니까요. 웬만한 가수들은 비교가 안돼요. 하하하"
"네..."
선수의 말에 뮤지컬을 한 번도 보지 못한 리에의 마음이 흔들렸다.
"그럼. 같이 가시는 걸로 할게요? 하하하"
"네. 알겠습니다."
"네. 하하하. 야~ 오렌지주스 진짜 시원하다. 히히히"
선수가 얼마 남지 않은 주스를 벌컥벌컥 마시며 말했다.
"그럼 제가 토요일 다시 연락드릴게요."
"네."
선수가 얼떨결에 리에에게 데이트 신청을 하고 미용실을 나섰다.
'우하하하하~ 이게 웬 떡이냐! 아니다 왠 뮤지컬이냐! 우히히 히. 방구야 이 형님이 드디어 아리따운 리에씨와 데이트를 하게 됐다 이거야!' 선수가 흥분한 채로 '덜덜덜~ '거리며 시동이 걸려있는 방구에게 소리쳤다.
그의 광대는 승천해서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선수가 리에에게 말할 때는 뮤지컬을 많이 본거처럼 말했지만 그도 지금까지 뮤지컬을 본 적이 없었다. 헌혈을 해서 뮤지컬 표를 받았다고 말한 것도 뻥이었다. 얼마 전 헌혈을 해서 받은 건 2장의 문화상품권이었다. 문화상품권을 보며 리에와 영화를 볼까 고민을 하고 있던 찰나 방구를 타고 운행을 돌던 길가 가로수에 꽂혀있던 뮤지컬 홍보 플래카드를 보고 순간적으로 잔머리를 굴린 것이었다. 영화보다는 뮤지컬이라고 하면 그녀를 설득시키기 더 좋을 거 같아서였다.
생각했던 데로 맞아떨어지자 자기 스스로도 뿌듯했다.
하루 종일 흥얼흥얼 거리며 운행을 돌았다. 마지막 무더위에 땀을 뻘뻘 흘리며 돌았지만 피로감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어느 거래처를 가던지 선수의 '안녕하십니까!'라는 인사 소리는 두배 크게 들렸다. 그런 선수를 보고 조합원들은 무슨 좋은 일 있냐고 물어보는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수금을 다 끝내고 은행으로 돌아왔다. 어김없이 모든 직원들이 정신없이 마감을 하고 있었다. 선수도 그들의 행렬로 들어가 마감을 마쳤다. 퇴근 시간이 되자 하나 둘 사무실을 나가 집으로 돌아갔다.
은영도 유니폼을 사복으로 갈아입고 후문 옆에서 선수와 같이 카풀하기 위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은영은 오늘처럼 하루가 안 가는 날은 처음이었다. 하루 종일 퇴근 후 카풀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선수와 카풀을 하기로 한 첫날. 알 수 없는 설렘으로 밤에 잠도 설쳤다. 은영의 핸드백 속에는 선수를 주기 위한 당근주스가 들어가 있었다.
"은영 씨 먼저 나오셨네요?"
"네."
"주차장으로 가시죠. 하하하."
선수는 여전히 흥얼흥얼거렸다. 은영이 선수의 기분이 매우 좋아 보여 말을 꺼냈다.
"무슨 좋은 일 있으신가 봐요?"
"네?"
"아까부터 계속 흥얼흥얼 거리고, 얼굴에 웃음이 사라지지가 않는걸요?"
"아~ 킥킥킥. 일을 끝마쳐서 그런가..." 선수가 은영에게 이유를 말하지 않고 대충 얼버무렸다.
주차장으로 들어온 둘은 선수의 1톤 트럭에 올랐다.
"안전벨트 매세요. 출발할게요"
"네."
'드르륵~ 드르륵~' 힘겹게 걸리는 시동 소리와 함께 선수가 차를 출발시켰다.
차가 출발하자 은영이 무릎에 올려놓은 핸드백 속에서 당근주스를 꺼냈다.
"피곤하실 텐데 이거 드세요."
"뭐예요?"
"아~ 제가 집에서 녹즙기로 짠 당근주스예요. 낮에 사무실 냉장고에 넣어 둔 걸 꺼내왔어요. 시원할 때 드세요"
"직접 만드신 거예요?"
"네. 제가 아침마다 먹는 건데 하다 보니 많이 만들어져서 가져왔어요"
은영이 말은 그렇게 했지만 선수를 주기 위해 일부러 만들어 온 거였다. 뭐가 좋을까 생각하다 커피는 일하면서 많이 마셨을 거 같아 몸에 좋은 걸로 만들어 왔다.
운전에 집중하고 있는 선수가 불편할 거 같아 직접뚜껑을 열어 좌석 옆에 놓인 컵 홀더에 놓았다.
"이야~ 안 그래도 출출했는데. 잘 먹을게요. 하하하"
"네."
차가 잠시 신호 대기하자 선수가 당근주스를 벌컥벌컥 삼켰다.
"우와~ 대박! 진심 맛있다. 이거 당근 말고 설탕도 들어갔나요?"
"아뇨. 당근만 즙을 짠 거예요"
"진짜요? 당근이 이렇게 달아요?"
"먹을만해요?"
"먹을만한 게 아니라. 엄청 맛있는데요. 하하하"
"다행이네요. 입에 안 맞으면 어쩌나 했는데. 호호"
맛있게 먹고 연신 감탄을 내뱉는 선수의 말에 은영이 기분이 좋았다. 앞으로 자주 만들어 와야겠다고 생각했다. 선수가 운전에 집중하느라 말을 하지 않자 순간 정적이 흐르고 분위기가 무거워지는 거 같아 은영이 말을 꺼냈다.
"주말에는 뭐하세요?"
"저요?"
"네"
"주말에 뮤지컬 보러 가기로 했어요. 하하하"
"뮤지컬이요?"
"네. 처음 가보는 건데 엄청 설레네요"
"은영 씨는 뮤지컬 좋아해요?"
"저... 저요... 한두 번 보기는 했어요..."
뮤지컬을 보러 간다는 선수의 말에 은영이 잠시 머뭇거렸다. 누구랑 가느냐고 물어보고 싶었지만 차마 물어볼 수 없었다. 남자 하고는 뮤지컬을 보러 가지 않을 거 같았다. 은영이 갑자기 말이 없어졌다. 선수가 당근주스를 마시는 걸 보며 좋아졌던 기분도 갑자기 엉망이 되어 버리는 거 같았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둘의 대화는 사라졌다. 은영은 멀뚱멀뚱 도로에 지나가는 차들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표정은 점점 굳어져 갔다. 잠시 후 선수의 차는 은영의 아파트 입구에 도착했다.
"도착했습니다. 야~ 직접 간 당근주스를 마시면서 왔더니 배고픈지도 모르겠고 힘이 불끈불끈 나는데요. 하하하"
"네. 운전하느라 고생하셨습니다."
은영이 선수의 농담에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차문을 세게 닫고 내렸다. '쿵~' 울리는 차 문 닫히는 소리가 차 안에 울려 퍼졌다.
'어~ 뭐지? 방금 전까지만 해도 기분이 좋아 보이던데...' 은영의 시큰둥한 대답과 쿵 닫아버리고 아파트 안으로 들어가 버리는 은영의 행동에 선수의 머리가 갸우뚱해졌다.
선수는 차를 돌려 나가고 은영은 집안으로 들어갔다.
효경은 아직 퇴근을 하지 않았는지 집안은 조용했다. 거실 소파에 앉았다. 방금 전 차 안에서 선수가 했던 말이 머리에서 떠나질 않았다.
'뮤지컬 관람은 처음 하는 건데 엄청 설레네요.'
'누구랑 가는데 이렇게 설렌다고 할까? 저번에 이성재 대리님 말로는 여자 친구는 없다고 했는데...' 그녀의 머리는 점점 더 복잡해졌다. 여친이 있는지 없는지는 알 수 없지만 주말에 뮤지컬을 보러 갈 사람이 남자는 아니라는 건 확실한 듯싶었다.
은영은 갑자기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다음회에 계속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