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워홀 에세이 3-2

피렌체에서의 ‘일 없는 여름’

by 킴소피


워홀로 왔다고 하면

대부분 사람들이 묻는 질문은 비슷했다.

"일자리 구했어?"

"어디서 일할 거야?"


사실 나도 이탈리아에 와서 일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있었다.

하지만 막상 시도를 해보려니 두렵고 막막했다.

어느 날은 쌓여가는 압박감에 눈물이 날 정도였다.


SNS와 워홀 커뮤니티에서

'일 잘 구하는 방법' 같은 글들을 계속 찾아보면서

어디선가 작은 희망이 생기기도 했지만

현실과 마음 사이의 거리감이 점점 더 크게 느껴졌다.


무엇보다 주변에서 느껴지는 압박감이 힘들었다.

돈을 줄어드는데 일은 해야 할 것 같고,

일을 찾으려면 영어는 기본,

그 위에 이탈리아어까지 더해야 한다는 분위기였다.

그런 현실이 내 마음을 무겁게 만들었다.


나는 이탈리아에 왔으면 이탈리아어를 쓰면서 일해보고 싶었다.

하지만 실제 구인 글들은 대부분 영어 능력자를 원했다.

나는 그 부분에서 자연스럽게 발걸음이 멈추었다.

꼭 영어 때문이라기보다,

내가 원했던 경험과 실제 구인 시장의 방향이 달랐기 때문에 마음이 쉽게 가지 않았던 것 같다.


이탈리아어만으로 일할 수 있는 자리를 찾아보기도 했지만

그런 곳은 드물었고,

또 그만큼 높은 실력을 요구했다.

그래도 CV를 수정하고 다섯 군데 정도 이력서를 제출했다.

될지도 모른다는 희망이 생기기도 했고,

연락이 오지 않으면 괜히 마음이 가라앉았다.


아마도 일이라는 것이

'내가 어떤 사람인지 증명할 수 있는 장치'라고

오랫동안 믿어왔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더 흔들렸고, 더 지쳤다.

한국에서 취업 스트레스가 너무 힘들어서

도망치듯 이탈리아로 왔는데

여기에서도 비슷한 감정을 마주하고 있다는 사실이

조금 허탈하게 느껴졌다.


나는 이곳에서 경험하고 싶어서 왔다.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을 알아가고 싶었고

새로운 순간들을 몸으로 겪고 싶었다.

그런데 어떤 순간에는

'굳이 이런 부담까지 안고 살아야 하나'

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아빠는 "100군데라도 지원해 보라"라고 했지만

나는 한국에서도 그렇게 해본 적이 없었다.


처음에는 일 못 구한 것이 서글펐고

영어라도 조금 공부해 둘 걸 하는 아쉬움도 들었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나' 하는 걱정도 잠깐 스쳤다.


내가 너무 우울해하자

부모님은 어느 순간

"그냥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지내도 된다."라고 말했다.

그 말이 오히려 마음을 가볍게 했다.


그래서 일자리를 찾는 일을 잠시 멈추기로 했다.


그러다 어느 날 갑자기 해방감이 찾아왔다.

일을 꼭 구하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이 들자

몸이 한결 가벼워졌다.


그때 먹었던 젤라또의 맛은 아직도 생생하다.

정말 오래간만에 느껴본 자유였다.


그래, 지금은 일자리 이야기는 잠시 내려놓자.

그렇게 마음을 정리했다.


예약하기 어렵다는 Acqua al 2에서
두 번이나 식사를 했다.
발사믹 스테이크와 블루베리 스테이크가 유명하다고 해서
호기심으로 예약을 넣었고,
승인 메일을 받았을 때 괜히 설렜다.
맛이 아주 놀라울 정도는 아니었지만
피렌체에서만 맛볼 수 있는 조합이라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다.



동네 근처엔 자주 가는 맥주 펍이 하나 있었다.
혼자 들어가 맥주를 추천받아 마시다 보면
어느새 두세 잔 넘어가 있고
따뜻해진 얼굴로 집으로 걸어오곤 했다.
여름의 뜨거운 공기가 살갗에 붙어있다가
시원한 맥주 한 모금에 씻겨 내려가는 느낌이 좋아
자꾸 그곳을 찾게 되었다.



미술을 깊이 아는 편은 아니지만
바티칸을 지나 피렌체까지 오면서
미켈란젤로와 카라바조 작품에 자연스럽게 끌렸다.
그래서 우피치 미술관엔 네 번이나 갔고
피티궁 전시도 종종 보러 갔다.
비 오는 날에는 자연스럽게 박물관으로 향하게 됐다.
티켓값이 비싸 투덜거리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그 공간들이 주는 감정이 좋아서
발걸음이 자꾸 그쪽으로 향했다.



미켈란젤로 언덕에서 노을을 보는 것도 좋아했다.
베키오 다리를 지나
아르노 강을 따라 걷는 저녁 산책은
이 도시에서 가장 사랑한 시간이었다.
부드러운 바람이 손끝에 닿는 감촉,
강가에 스며든 사람들의 저녁 시간,
그 모든 것이 내 마음을 조금씩 풀어주었다.



가끔은 새벽에 깨어

조용한 거리를 걷기도 했다.
아무도 없는 피렌체의 새벽은
이상하게 마음을 가라앉히는 힘이 있었다.


이 시기 나는 돈을 꽤 많이 썼다.
집에서 요리를 해먹기도 했지만
대부분 외식하며 피렌체를 즐겼다.
그래도 전혀 아깝지 않았다.
일을 못 구했다고 해서 불안하거나 죄책감도 없었다.
도시를 누리는 법을 배웠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큰 공허함이 찾아왔다.
피렌체에서 처음 마주한 ‘노잼 시기’였다.


일을 못 구한 데서 나온 작은 죄책감이
어느 순간 크게 부풀어 있었다.
무엇을 해도 하루가 길게 느껴졌고
밥을 해 먹는 것도 귀찮아졌다.
맛있는 것을 먹어도
집으로 돌아오면 금세 기운이 빠졌다.


밖은 너무 더워서 조금만 걸어도 지쳤고
집에는 선풍기도, 에어컨도 없어
숨이 턱 막히는 날이 많았다.
카페나 펍으로 피신하듯 나갔지만
그곳에 계속 머물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그 시기엔 함께 시간을 보낼 친구가 없었다.
가끔 만나는 한국인 친구들 말고는
산책하거나 대화를 나눌 또래 친구가 거의 없었다.
맥주 펍에서 알게 된 사람들은 대부분 나이 차이가 컸고
가볍게 편해지기 어려운 관계였다.


‘나만 제자리인 것 같다’
그런 생각이 계속 들었다.
이렇게 여름을 보내면 왠지 손해를 보는 기분이 들었다.
무더위 때문에 여행조차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즈음 인터넷을 뒤지다

숙식이 제공되는 자원봉사 프로그램을 알게 되었다.

지금의 나에게는
그런 형태의 작은 이동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집에만 있으면 무기력해지고,
몸도 마음도 정체된 느낌이라
뭔가 움직이고 싶었다.
사람들과 더 이야기하고,
몸도 조금 써보고 싶었다.
그래서 우핑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나는 어른들과 일하는 것보다
아이들과 함께 있는 게 더 편한 편이라
아이들 대상 프로그램을 찾아보다가
페이스북에서 일주일 동안 진행되는
여름 캠프 스태프 모집 글을 발견했다.
해외 지원자도 환영한다는 문구가 마음에 들어
망설이지 않고 신청했다.


그리고 며칠 뒤,
출발 이틀 전에 연락이 왔다.


장소는…
밀라노 근처의 작은 도시, 브리비오.


그때부터 피렌체의 여름은

조금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도시의 고요함에서 벗어나

전혀 다른 곳에서 새로운 여름을 만나게 될 줄은

그땐 미처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