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자리 없는 워홀러의 생존기
이탈리아에 도착했을 때만 해도 무엇이든 해낼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이 있었다.
하지만 워킹 홀리데이는 결국 '일'이 기반이 되어야만 지속 가능한 현실이라는 것을
깨닫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구직 활동은 계속 이어갔지만 돌아오는 결과는 냉담했고,
통장 잔고는 하루가 다르게 줄어들었다.
결국, 생활비는 아버지께 손을 벌려야 했다.
적게는 100만 원에서 많게는 300만 원까지 송금을 받으며 지냈다.
이 과정에서 말로 다 할 수 없는 죄책감이 밀려왔다.
하지만 이 생활을 포기하고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스스로에게 주어진 이 시간을 끝까지 버텨내고 싶었다.
일은 없었지만, 최소한의 비용으로 최대한의 이탈리아를 경험하는 것이
나의 새로운 생존 목표가 되었다.
가장 먼저 잡아야 할 것은 정신을 갉아먹는 '불안함'이었고,
그 불안함의 가장 큰 요인은 바로 '주거비'였다.
나의 경우 가장 큰 압박감은 숙박비였다.
피렌체 집 계약 기간이 끝난 10월부터 숙소를 찾아 헤매면서
스트레스는 극에 달했다.
나는 제대로 자지도 못하고 먹지도 못해 살이 쭉쭉 빠지기도 했다.
나에게 가장 중요한 주거 요소는 '안전한 주거환경'이었다.
아무리 저렴해도 방과 화장실은 최소한의 안락함을 주어야 했다.
한 번은 너무 저렴한 가격에 나폴리 호스텔을 예약했다가
심적인 손해를 입었었다.
건물의 중앙 부분이 뚫려 있어 너무 추웠고 주방 환경도 열약했다.
낯선 환경에서의 불안함이 더 커지는 경험이었다.
반면, 조금 더 돈을 주고 들어간 호스텔에서는 따뜻한 물과 넓은 주방,
공용 바 등 덕분에 그나마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
이후 에어비앤비를 찾았을 때는 더 놀라웠다.
일주일 숙박 가격이 100만 원이 평균인 것이었다.
막막함을 넘어 좌절했다.
예상한 것과는 다르게 치솟는 물가에
'집으로 돌아가야 하나' 하는 회의감도 들곤 했다.
결국 다른 방법으로 찾은 '단기 렌트 사이트'에서는
세 달 계약 집을 구했지만, 업데이트 오류로 이미 계약이 찬 상태였다.
환불금을 돌려받는 과정에서 집주인과 개인적인 연락을 주고받으며
불필요한 스트레스를 더 받기도 했다.
이처럼 예측 불가능한 숙박비와 계약 문제는 나에게 큰 고난을 안겨줬다.
주거 스트레스 속에서도 나에게 작은 기쁨과 뿌듯함을 안겨준 건
'식비를 줄이는 마트 공략'이었다.
이탈리아에는 Coop, Conad, Carrefour, Pam 등 다양한 마트가 있다.
나는 주로 Coop과 Penny 마트를 애용했다.
Coop은 개인적으로 고기와 과일이 신선한 편에 속한다고 느꼈다.
특히 특정 세일 시간대를 노리면 득템의 기회가 많았다.
정확한 시간은 아니지만 평일 오후 5시 30분부터 7시 사이,
6유로 하던 300g짜리 고기를 3~4유로에 '득템'할 수 있었다.
이미 조리된 음식들도 할인 코너를 잘 뒤져보면 발견할 수 있다.
피렌체 거주 당시 가까웠던 Penny 마트는 나의 최애 장소였다.
과일과 채소 가격이 전반적으로 낮았고,
다른 마트와 달리 낱개로 무게를 달 수 있는 시스템이 아니어서 조금씩 사기 적당했다.
프로슈토와 치즈 같은 경우에도 1~3유로 안팎으로 저렴했고,
포인트를 적립하는 재미까지 쏠쏠했다.
나는 주로 한 번 장을 볼 때 20유로(한화 3만 4천 원)를 넘기지 않으려 노력했다.
그래서 소개하는 나의 '만만한 채소 공략법'은
토마토, 주키니, 오이, 양파, 감자, 마늘 등 자주 쓰는 채소 위주로 소량 구매하는 것이었다.
양파나 마늘은 한 망에 3-4개가 들어 있고 2유로 안팎이면 구매 가능했다.
양파는 적양파, 흰 양파(한국 양파와 유사)가 있는데
Penny의 경우 흰 양파가 몇 센트 저렴했던 걸로 기억한다.
주키니와 오이는 3개씩만 구매하는 습관을 들였다.
많이 구매하면 썩혀 버리는 경우가 생겼고, 이는 곧 지출이었다.
채소를 고를 때는 크고 길고 단단한 것을 고르는 게 나만의 팁이 되었다.
일자리를 구하지 못한 덕분에 역설적으로
돈이 없어도 이탈리아를 즐기는 '개꿀' 방법을 터득할 수 있었다.
이탈리아에는 매달 첫째 주 일요일 등 특정 날이 '문화체험의 날'이어서
우피치 미술관, 폼페이 유적지, 나폴리 고고학 박물관 등
유명 박물관이나 미술관이 무료로 개방된다.
물론 사람들이 많은 것은 감수해야 하지만, 입장권 하나에 20유로 가까이 하니
이만한 꿀팁이 있을 때 활용하는 게 좋았다.
나는 이 기회를 활용해 우피치 미술관 2번, 폼페이 1번, 고고학 박물관 1번을 다녀왔다.
돈이 없어도 문화 체험을 할 수 있다니 너무 행복했던 날들이었다.
생활용품과 의류를 절약하기 위해선 벼룩시장(Flea Market) 탐방을 빼놓을 수 없다.
피렌체의 산토 스피릿츠 광장 벼룩시장은 매주 일요일 오전부터 오후까지
주로 의류, 잡화, 식물 등을 판매했다.
빈티지 의류 재킷을 10유로에 살 수 있는 저렴한 곳이어서 많이 애용했다.
브랜드 제품들도 다수 발견할 수 있었다.
또한, Casine(카시네) 벼룩시장도 효율이 좋았다. 매주 화요일 오전~오후 2시까지 열리고,
여기서 내 친구는 가죽 가방을 5유로에, 나는 넥타이 2개를 1유로에 구매했던 경험이 있다.
앞 시리즈에서 언급했지만, 매번 오는 커피차에서 에스프레소를 1유로에 마실 수 있는 행복은
여기서만 누릴 수 있었다.
과일도 낱개가 아니라 kg당으로 5유로 안으로 저렴하게 구매 가능했다.
이처럼 벼룩시장은 나의 지친 지갑을 달래주는 보물창고였다.
비록 일은 구하지 못했고 환경이 갈수록 궁핍해졌지만,
이 1년은 나에게 돈보다 귀한 가르침을 남겼다.
절약 정신을 통해 돈과 물질에 대한 가치관이 성숙하게 변화했다.
무언가를 살 때 '뇌 빼고' 사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정말로 필요한지,
3번 이상 쓸 의향이 있는 생필품인지를 신중하게 고려하게 되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혼자 살 수 있는 힘'을 길렀다는 것이다.
돈의 소중함을 절실히 느꼈을 뿐만 아니라,
반대로 돈이 없을 때 어떻게 무기력하지 않게 살아갈 수 있는지에 대한 방법을
연구하고 배우는 과정 자체가 만족스러웠다.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어떤 것을 먹고, 입을 때 행복한지 나의 취향을 더 확실히 알아가는 계기가 되었다.
이탈리아에서의 여정은 여기서 끝났지만, 이야기는 계속됩니다.
다음 편에서는 이탈리아를 떠나 한국으로 돌아온 후 비로소 깨달은
이탈리아의 진가와 변화에 대해서 이야기할게요. 기대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