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만난 언어, 처음 불린 이름
1월 7일, 입학날이 다가왔다.
나는 다시 캐리어를 끌고 대문을 나섰다.
대학교로 가는 길을 찾지 못해 가파른 계단을 올랐다.
패딩 속으로 땀이 맺혔다. 생각보다 숨이 찼다.
학교는 생각보다 컸다.
웅장한 건물 앞에서 잠시 멈췄다.
처음 보는 규모였다. 괜히 어깨가 작아졌다.
오늘은 레벨 테스트와 오리엔테이션,
그리고 첫 수업이 있는 날이었다.
캐리어를 끌고 들어가니 시선이 쏠렸다.
직원에게 사정을 설명하니 흔쾌히 짐을 맡아주셨다.
학교 안 우체국 사무실이었다.
나중에 알았다. 그분이 그곳 직원이었다는 걸.
작은 강의실에 들어가 레벨 테스트를 봤다.
여러 나라에서 온 학생들이 보였다.
눈이 마주치면 웃었다.
나는 이미 온라인 시험에서 A2를 받았었다.
교수님과 짧은 대화를 나누고 결과를 받았다.
A2.1. 오른쪽 방으로 가라는 안내였다.
그 숫자를 보고 잠시 멈췄다.
한국에서 열심히 공부했는데.
조금은 아쉽고 속상했다.
노력의 무게가 숫자로만 보이는 게 싫었다.
그래도 인정해야 했다.
이곳에서는, 나는 아직 시작 단계였다.
오리엔테이션이 시작됐다.
학교 행사, 공휴일, 우체국 위치 같은 걸 안내했다.
그때 C라는 친구를 만났다.
아프리카계 남자였고, 나보다 한 살 어렸다.
프랑스어, 스페인어, 영어를 모두 할 줄 알았다.
이탈리아어도 능숙했다.
‘이런 애가 뭘 배우러 왔을까.’
그렇게 말을 트게 되었다.
수업은 11시부터 13시까지였다.
점심시간이 애매했다. 언제 밥을 먹어야 할지 몰랐다.
첫 수업부터 실수를 했다. 반을 찾지 못했다.
교실이 전부 로마 숫자로 표시되어 있었다.
나는 로마 숫자를 읽지 못했다.
직원에게 도움을 청해 겨우 들어갔다.
이미 출석 체크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Buongiorno.”
작게 인사하고 앞자리에 앉았다.
수업은 두 시간씩, 두 분의 선생님이 번갈아 진행했다.
오늘은 첫날이라 11시부터 13시까지만 들었다.
교실엔 여러 나라에서 온 학생들이 있었다.
각자 어디서 왔고 이름은 무엇인지, 이탈리아에는 왜 오게 된 것인지 자기소개를 했다.
나는 내 차례가 돌아오자 천천히 말했다.
“Mi chiamo Donghyun.
Vengo dalla Corea del Sud.”
교수님이 고개를 끄덕이며 출석을 부르기 시작했다.
내 이름 앞에서 잠시 멈췄다.
“Dong…?”
익숙하지 않은 억양으로 내 이름이 불렸다.
이탈리아 사람들에겐 어려운 소리였다.
나는 작게 웃으며 말했다.
“제 이름이 부르기 어려울 거예요.
그러니까 이탈리아 이름인 Sofia로 불러주세요.”
그 순간,
나 자신을 조금 번역한 기분이었다.
이제 나는 Dong이 아니라 Sofia였다.
이탈리아어로 하루를 시작하는 또 다른 이름이었다.
쉬는 시간에 앞줄의 여자애들과 이야기를 나눴다.
어색했지만, 웃음소리가 가볍게 섞였다.
내 영어는 서툴렀고, 말끝이 자꾸 막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불편하지 않았다.
모두가 웃었고, 그게 전부였다.
그날 처음으로 ‘통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걸 배웠다.
그날 저녁, L과 M과 함께 밥을 먹기로 했다.
L은 같은 기숙사에 사는 친구였다.
낯선 도시에서 약속이 생겼다는 사실이 조금은 든든했다.
수업은 어려웠다.
모르는 단어, 낯선 문장.
교과서는 두껍고,
한 달 동안 이걸로 공부한다니 겁이 났다.
수업이 끝나자 머리가 하얘졌다.
짐을 찾으러 1층으로 내려갔다.
직원분이 나를 알아보고 캐리어를 내주셨다.
기숙사까지 버스를 타야 했지만, 짐이 너무 무거웠다.
한참 고민하다 택시를 타기로 했다.
직원분은 “걱정 말라”며 택시를 불러주었다.
그 말이 이상하게 따뜻했다.
기숙사에 도착해 서류를 작성하고 방을 배정받았다.
문을 여는 순간, 공기가 달랐다.
복층 구조였고, 계단 아래엔 침대와 냉장고,
화장실이 있었다.
침대커버엔 얼룩이 있었고, 머리카락이 수북했다.
‘여기선 못 자겠다.’
사무실로 올라가 말했다.
“침대 커버가 너무 더러워요.”
직원은 믿기 어렵다는 듯 말했다.
“청소 아주머니를 부를게요. 잠시만 기다리세요.”
한 시간, 두 시간이 지나도 오지 않았다.
‘그래, 여긴 한국이 아니지. 이탈리아잖아. 원래 느려.’
그렇게 스스로를 달랬지만, 기분이 좋지는 않았다.
어쩐지 서운했다.
이 낯선 나라에서는 ‘기다림’조차 다른 온도를 가지고 있었다.
약속 시간이 다 되어 밖으로 나섰다.
학교까지 걸으면 한 시간.
버스표도 없었고, 길도 몰랐다.
그래도 걸었다.
참 무모했다.
L과 M을 만났다.
L의 친구 한 명도 함께였다.
우리는 어색하게 인사하고 카페로 갔다.
‘저녁 먹자’고 해서 밥을 먹는 줄 알았다.
아무도 밥을 먹지 않았다.
한 명은 이미 먹고 나왔다고 했다.
배가 고팠지만 그냥 웃었다.
각자 자기소개를 하고 이야기를 나눴다.
나는 주로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이탈리아어를 섞어 말했다.
그날 밤, 처음으로 외로움이 조금 줄었다.
기숙사로 돌아오자 또 문제가 생겼다.
L의 룸메이트가 남자였다.
여자 전용 호실인데 말이다.
게다가 그 남자는 아침에 만난 C였다.
L과 나는 사무실로 갔다.
직원은 또 믿기 어렵다는 표정을 지었다.
“C, 너는 3번 방으로 가.”
하지만 3번 방은 내 방이었다.
“3번은 제 방이에요. 여자 룸메로 신청했어요.”
직원은 잠시 고민하더니 말했다.
“그럼 L이랑 너는 1번 방에서 자. C는 3번으로.”
들어오자마자 날벼락이었다.
짐을 다시 옮겨야 했다.
그래도 L과 함께 방을 쓰게 되어 다행이었다.
L은 나보다 일곱 살 어렸지만 성숙했다.
그렇게 첫날이 끝났다.
나는 오늘을 이겨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