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고군분투기는 한 마디로 내 고생한 경험을 나누는 글이라고 할 수도 있다. 나의 고생담 중에 엄마와의 생활을 뺄래야 빠질 수 없다. 그저 성격이 맞지 않아서 오는 고생이다. 꼼꼼이와 덜렁이와의 만남이라 더 하다.
나는 꼼꼼이 엄마의 성격을 닮지 않고, 덜렁이 아빠의 성격을 닮아서 서로 맞춰가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내가 많이 봐주는 거 같은데 서로 이야기 해 보면 엄마도 만만치 않게 나를 봐 주고 있음을 알게 된다. 엄마도 참 내가 자신을 잘 따라주지 않아서 힘들었다고 말이다.
그릇도 차곡차곡 분류해서 설거지 끝난 후에 싱크대 건조대에 옮겨야 하고 빨래도 짝짝 잘 펴서 널어서 나중에 옷 갤 때 편해 진다고 말이다. 빨래가 말라서 옷을 갤 때 엄마의 말이 맞다는 걸 여실히 느낀다. 옷도 반듯하게 잘 개신다. 그에 비해 난 반듯하게 되지 않아서 내 스스로 스트레스를 주기도 한다.
‘나는 반듯하게 안되는 가.’
청소도 깔끔하게 광이 나게 반짝반짝 빛나게 하신다. 나는 그 반대로 적당히 하면 안될까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내 어머니는 적당히가 없다. 뭐든지 열심히 하고 완벽하게 해 내려는 경향이 강해서 자칫 몸을 망칠까 걱정은 된다. 좀 흩어트리고 각 재지 않고 지내면 어디 덧나나 싶은 게 덜렁이 난 숨이 막힌다. 근데 그걸 닮은 남동생도 있다. 엄마가 다행히 자신과 성격이 닮은 남동생이 있어 든든해 하신다. 이 둘에게 부녀는 알짤 없이 정리/청소에 대한 잔소리를 듣는다.
한창 정신 없이 멍하니 집에서 앉아 있거나 누워서 쉬고 싶어 할 때가 있었다. 아무것도 하기 싫었다. 그때 내 가족의 가훈으로 엄마가 나를 살림 필드로 끌어내셨다. 하기 싫어 죽겠는데 걸레 짜는 법부터 요리까지 가르치기 시작했다. 일일이 하나씩 가르치고 시켰다. 보통 나 처럼 힘들어 하면 포기 할 만 한데, 포기를 모르는 엄마였다. 그 덕에 지금의 내가 있고, 엄마 잔소리 피한다고 4년 4개월을 일부러 나가서 일했다. 그나마 엄마의 잔소리에서 벗어나 일을 하는 데 일이 엄마 잔소리보다 견디기는 쉬웠다. 틈틈이 문화센터에 가서 요리를 배워서 요리도 잘 할 수 있게 되기도. 엄마의 노고에 한편으로 고마울 뿐이다. 엄마가 열심히 나를 가르치지 않았음 이 글을 쓰는 난 있지도 않았다.
좀 그런 게 또 있다. 일거수 일투족을 자신의 손이 들어가지 않음 안되는 묘한 규칙있다. 바로 자신의 허락 없이 패션을 내 맘대로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내가 직접 살 수도 없다. 같이 나가서 자신이 골라주거나 내가 고른 옷을 검사를 받고 심의통과를 해야 한다. 그렇지 않음 내가 마음에 드는 옷은 못 산다. 대학생때 한 번 샀다 찢겨져 버린 적이 있다.
오로지 북쇼핑이 유일한 낙이였다. 근데 이제 북쇼핑도 재미를 잃었다. 1번만 읽고 책장으로 직행하니 엄마가 아까워하신다. 그래서 잔소리가 만만치 않았다. 북쇼핑도 접어야 했다.
엄마가 내 취미를 어릴 때부터 막은 게 많아서 거의 숨어서 했다. 내가 갖고 싶은 물건을 엄마 몰래 사 들이고(이건 지금도 말 하지 않고 사들임), 먹고 싶은 것도 몰래 사 먹고(자신의 입맛에 맞지 않는다고 나도 먹지 말란다.), 취미생활은 어쩔 수없이 공개다. 근데 생각 외로 취미생활은 받아들이는 모양새였다. 엄마의 태도 변화에 내가 편해지긴 했다. 그래서 내가 숨을 쉴 수 있게 되었다. 그 때가 내 나이 37세가 되어서였다. 정말 징하지?
엄마와는 그래도 사이는 좋다. 엄마가 나를 곁에 두려고 한다. 그러면서 예전에 비해 많이 줄었지만 엄마의 잔소리는 여전하다. 덜렁이고 차곡차곡 분류해서 잘 쌓지도, 도마질을 잘 하지도 못하기에 -양념은 그런대로 잘한다고 맡기신다.- 그런다. 좀 빡빡하게 딱딱 떨어지게 살지 말고 엉성하게 살아보면 안될까. 어쩔 땐 숨통이 조여온다.
그래도 엄마와 잘 지내야 하기에 엄마도 나에게 맞추려…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할 수 있는 대까지 맞추려 한다. 전부 엄마말이 맞지만 숨통을 트고 살았음 한다. 엄마는 딱딱 떨어지며 완벽하게 하는 게 자신의 스타일이지만, 나는 그 반대라 …….
그래도 행복하게, 별 잡음없이 잘 지내는 모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