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나야 NAYA Apr 05. 2020

안네의 일기가 되어버린, 2020년 3월의 일기

하루에 하나, 짧은 사유 (思惟): 2020年 3月의 기록

三月 十日

: 평범하지 않은, 그러나 일상적인      

역사 속을 걷고 있는듯한 요즈음이다. 무심하던 그간의 일상이 얼마나 많은 노력과 행운으로 지탱되어 온 것인지 뼈아프게 깨닫는 시간이기도 하고. 불같이 타오르던 대구의 소식들이 점차 사그러들 기미를 보이자 ‘이제는 서울이 시작’이라는 소식이 곳곳에서 들려온다. 그냥 무사히 이 사태가 종식되기를 기도하는 수밖에.   

   

3월도 벌써 열흘이 흘렀다. 다음 주부터는 온라인 강의가 시작되는데, 수업이 어떻게 진행될지 꽤 궁금하다. 평소 ‘인강’이 거의 없는 우리 학교였기에 진행이 엉망은 아닐까 걱정했었는데, 오늘 교수님들께서 체계적인 교육을 받았다는 메일이 날아왔다. 어떤 교수님은 유튜브로, 어떤 교수님은 학교 실시간으로, 또 어떤 교수님은 학교 프로그램을 통해 강의를 하신다는데, 얼른 수업을 들어보고 싶다!      


三月 十五日     

: 사회적 거리 두기의 등장 

‘사회적 거리 두기’가 한창인 요즈음이다. (사회적 거리 두기-라니, 정말 좋은 슬로건인 것 같다 ㅎㅎ) 지난주까지만 해도 마스크를 착용하지 않은 채 엘리베이터를 타는 사람들도 보였는데, 요즘은 사람들이 엘리베이터 버튼도 잘 누르려 하지 않는다. 에너지 절약을 위해, 혹은 노약자를 위해 닫힘 버튼을 누르지 말자는 수많은 캠페인을 봐왔지만, 요즘처럼 사람들이 닫힘 버튼을 누르지 않는 적이 없었다. 한국인의 ‘빨리빨리’ 정서를 단숨에 이겨버린 코로나의 위력인 듯하다.      


갖가지 방법으로 버튼을 누르는 모습도 꽤 흥미롭다. 나는 손가락을 굽혀 마디로 버튼을 누르는 편인데, 휴지를 대는 사람도 있고 핸드폰이나 차키 같은 물건으로 손가락을 대신하는 경우가 제일 많은 것 같다.      

...

한국에서 슬슬 사태가 종식될 것 같다는 긍정적인 기운이 감돌자마자 미국과 유럽에서의 확산이 시작되었다. 교환학생을 간 친구는 개강이 한 달 연기되었다는 소식에 절망했고, 또 다른 친구는 사재기에 대비해 쉼 없이 장을 보러 다닌다고 했다. ‘이 시국’인 만큼, 둘 이상씩 짝지어 외출한다는 말을 덧붙이며.      


내일부터 온라인 수업이 시작된다. 초중고등학교의 개학은 더욱 늦춰질 전망이라는데, 어쨌든. 전혀 예상치 못했던, 새로운 시작의 초입이다. 모두에게 드리운 짙은 안개가 지나가고, 얼른 볕 뜰 날이 오기를 바란다.     


三月 十七日     

: 안네의 일기 

파일 정리를 하다가 두 달 전인, 1월 13일에 적은 일기를 발견했다.  대충 이러한 내용이었다. 

-

코타키나발루에 다녀온 지 벌써 일주일이나 지났다. 일기를 써야지, 써야지 다짐만 하다가 결국 1월도 중순이 되어버렸다. ... 여름에 있을 중국 단기교환 프로그램을 신청할 예정이다. ... 운 좋게도 집 근처에서 한국사 시험을 볼 수 있게 되었다. ... 일기장에 인격을 부여하며 온갖 잡담을 쏟아내었던 안네처럼, 읽을 이 없는 일기와 들을 이 없는 메아리도 나름의 의미가 있을 테니 일기를 열심히 써야겠다. ....       

-     

고작 두 달 전 일기인데 이렇게 위화감이 크다니. 여름방학에 중국으로 어학연수를 가겠다는 생각은 터무니없는 소리가 되었고, 한국사 시험은 마스크를 착용한 채 겨우 응시했으며, 코타키나발루는 한국인 입국이 금지된 지 오래되었며, 교환학생을 떠난 친구들은 유학생 입국 권고에 가슴을 졸이고 있다. 저 때 왜 ‘안네의 일기’를 왜 떠올렸는지 알다가도 모르겠지만, 인터넷 강의와 모든 동아리, 행사 취소로 집에만 머무르는 요즈음 꽤 적절한 비유인 것 같아서 마음이 아프다.      


三月 十八日     

: 뜻밖의 수확, 온라인 강의

인터넷 강의 3일 차가 되었다. 한 줄 평을 하자면, 코로나는 사라져야만 하지만, 사이버 강의는 살아남아야만 한다는 것이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온라인 강의에 대한 불신이 가득했는데, 막상 수업이 시작되자 범접할 수 없는 매력에 제대로 홀려버렸다. 이 시스템이 언제까지 유지될지는 모르지만, 개인적으로는 단점보다 장점이 훨씬 눈에 들어온다. 


우선, 통학러( :통학하는 사람을 지칭하는 용어. 비슷한 용례로 ‘자취러’ 등이 있다)인 나는 왕복 2시간을 통학시간으로 사용했는데, 그 대신 2시간씩 운동을 하기 시작했다. 통학시간 줄인 김에 뭐라도 하자는 생각이었는데, 삶의 질이 미친 듯이 올라간다.     

 

시간 효율성도 아주 좋다. 예컨대, 어제는 1교시 수업 이후에 3교시 수업이 있는 날이었다. 학교에 갔다면 건물 라운지에서 과제를 하거나, 여학생 휴게실에서 쪽잠을 자거나, 건물을 이동하며 시간을 쏟는 것 밖에 하지 못했을 것이다. 대신 어제는 2교시 공강을 이용해 택배를 부치고, 동네 산책을 하고, 홈트레이닝을 했는데도 다음 교시까지 시간이 30분이나 남았었다. 덕분에 막간을 이용해 기타 연습도 했다!       


싸강 기술은 생각보다 나쁘지 않고, 채팅창을 이용해 질문을 올리거나 자체 프로그램 (퀴즈 기능, 손들기 기능 등)을 활용해 수업할 수 있어서 꽤나 편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 시스템이 자리를 못 잡은 학교도 많은 것 같고, 만족하는 학생들과 불만족하는 학생들이 확연히 나뉘지만, 인강을 좋아하는지 현강이 더 집중이 잘되는지 정도의 차이인 것 같다는 의견이다.  무엇보다 상황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즐거워 하시는 교수님들 덕분에 기분 좋게 수업을 듣고 있다.     


三月 二十九日

: 한국행 비행기 

교환학생을 갔던 친구들이 대부분 돌아왔다. 프랑스에 가 1월에 개강을 한 친구는, 두 달간 적응을 위해 갖은 고생을 하고 이제야 조금 즐길 수 있게 되었는데 한국에 돌아오게 되었다고 슬퍼했다. 3월 개강을 위해 독일로 갔던 친구는, 결국 하루도 학교를 다니지 못하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절대 한국으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스페인에 있는 친구도, 미국으로 갔던 친구도 모두 한국으로 오는 티켓을 예매했다. 


교환학생을 가기 위해 정말 오랜 시간 준비했음을 알고 있기에, 20대의 로망을 모두 교환학생에 투자한 친구들의 한국행이 다행스러우면서도 마음이 아팠다. 그래도 살다보면 또 다른 기회가 찾아오겠지-하는 마음으로 서로를 토닥이는 중이다. 중, 고등학교 학생들의 온라인 개강이 화두에 오르고 있는데, 과연 대학생도 듣기 힘들어하는 온라인 수업이 잘 진행될지 걱정이다. 


내일은 캐나다로 어학연수를 가기 위해 반 년간 휴학을 하며 이를 준비했던 친구가 한국행 비행기를 타는 날이다.   


三月 三十一日     

: 낯선 일상  

제발 집에 있으라-는 당부의 말들이 재난 문자로 하루에도 몇 번씩 날아오는 요즈음이다. 무역 관련 직종에 종사하시는 아빠의 회사는 심각한 경영난에 시달리고 있고, 나는 힘든 시간을 보내고 계시는 부모님께 혹여나 해가 될까 두려워 외출을 자제하고 있다. 마스크를 사러 갈 때, 포장주문 한 음식을 받으러 갈 때를 제외하면 집 밖으로 전혀 나가지 않는다. 온라인 강의도 이제 슬슬 지치게 느껴진다. 최전선에서 고생하시는 분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지만, 일상을 완벽하게 잃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하루에 하나, 짧은 사유(思惟)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