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실한 것이 중요한 것이 되는 기적에 대하여
무엇을 써야 할까. 글을 쓰기 전이면 늘 했던 질문이지만 요즘 내겐 뜻이 달라졌다. 무엇이 내 마음에 닿았는가가 아니라 무엇을 써야 먹힐까, 사람들이 많이 클릭할까 궁리한다. 쉽고 짧게 많이 올릴 수 있는 글을 써볼까. 베스트셀러 위주로 책을 소개해볼까. 고민 끝에, 나는 잘 모르지만 유명한 가수를 소개해보기로 한다. 검색을 하고, 노래를 들어본다. 끄적여 본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 딴짓을 한다. “블로그 글쓰기 팁! 상위 노출되는 법!” 같은 유튜브를 클릭한다. ‘그래 이런 걸 사람들이 좋아하는데...’ 끄덕인다. 다시 글을 쓰려다 읽던 책을 집어 든다. 존경하는 소설가의 책을 읽다가 문장을 만난다. 한참을
멈춘다.
중요한가를 묻지 말고 절실한가를 물어야 한다. 나를 빼고 나 아닌 것에 대해서 말하는 식으로는 절실함을 표현할 수 없다. 내가 관여된 것만이 절실하다. 내가 관여된 모든 것이 아니라 내가 관여된 어떤 것이 절실하다. 내가 관여되지 않은 어떤 중요한 것도 절실하지 않다. 중요한 것이 다 절실한 것이 아닌 것처럼 절실한 것이 다 중요한 것도 아니다. 절실하지 않은 중요한 것을 말한다고 중요한 것이 절실해지지는 않는다. 그러나 중요하지 않은 절실한 것을 말할 때 그 절실한 것은 때때로 중요해진다.
- 이승우, <소설가의 귓속말>
이승우 작가님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절실한 것에 대해 쓰라고 말한다. 중요한 것은 많은 사람들이 중요하게 여기는 것, 이슈, 유행이고 절실한 것은 내게 특별한 의미를 갖는 대상이다. 책상을 예로 드셨다. ‘나’와 직접 관계 맺은 ‘내 책상’에 대한 글이 ‘절실한’ 글이다. 내가 책상에 남긴 흔적, 함께 보낸 시간, 내 책상에서 새롭게 발견한 의미가 절실한 글이 된다. 절실한 글은 ‘나’밖에 쓸 수 없다.
‘내 책상’에 대해 잘 쓰는 것은 일반적인 ‘책상’을 잘 표현한 글이 된다. 내 책상이 아닌 일반적인 책상에 대해 쓰려하면 다른 사람들도 이미 알거나 쉽게 알 수 있는 피상적인 정보나 진부한 비유를 나열할 수밖에 없다. 반면에 내게 특별한 의미가 있는 책상, 내가 다르게 본 책상을 쓴 글은 읽는 이에게 자신에게 책상은 어떤 의미인지 질문하게 한다. 작가가 보낸 긴 사유의 시간을 독자도 보낸다. 나에게 절실한 글이 누군가에게도 중요한 글이 되는 순간이다.
그러나 내가 관여된 것에 대해 쓰는 일은 수고롭다. 검색이 아니라 관찰이 필요하다. 아무에게도 물을 수 없고 오직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 ‘나’와 대화할 수 있는 충분히 길고 고독한 시간이 필요하다. 혼자 사는 이가 겪는 몸살처럼 아무도 몰래 끙끙 앓는 시간이 요구된다. 그 시간은 대개 드러나지 않는다.
나는, 무엇을 써야 할까 고민했던 나는, 인기 있는 글을 쓰려했다기보다는 그 길고 고독한 시간에서 도망치고 싶었다. 도망치려 짐을 몰래 싸고 문을 나서려는 찰나 이승우 작가님의 문장을 마주쳤다.
“중요한가를 묻지 말고 절실한가를 물어야 한다.”
이 문장 앞에선 그럴싸한 변명이 나오지 않는다. 절실한 시간을 보내는 것이 귀찮고 두려웠습니다. 인정할 수밖에 없다.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하고 문 앞에 내밀었던 부끄러운 발을 다시 들여놓는다. “그럼.. 저는 다시 들어가.. 네.. 들어가 보겠습니다.” 책상으로 돌아와 빈 화면을 본다.
“중요한가를 묻지 말고 절실한가를 물어야 한다.”
이 문장이 있는 책 제목은 <소설가의 귓속말>이다. 물음표가 없는데도 묻는 듯하다. 느낌표가 없는데도 소리치는 듯하다. 귓속말처럼 내게 비밀을 전달하는 것 같고 귓속말처럼 크게 들린다. 어쩌면 오래전부터 내가 지니던 문장이다. 내 안에 있었지만 외면하거나 이런저런 말을 덧붙여 타협했던 문장이다. 글은 길어도 짧아도 이슈여도 아니어도 괜찮다. 다만 절실했는가. 쓰고 싶다는 설렘에서 출발한 글감이 글이 될 때까지 그 앞에 충분히 고독하고 충분히 나와 대화했는가. 충분하려 발버둥 쳐도 충분하지 않음을 알면서도 그렇게 했는가. 묻는다.
그래서 무엇을 써야 할까. 같지만 달라진 질문을 다시 던진다. 시간이 좀 필요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