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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숲 Jul 12. 2020

방탈출 실패기

고치에 애벌레는 모두 나비가 되나요? 

“여름 되기 전에 나갈게” 연초에 퇴사를 하고 오랜만에 가족들이 사는 집으로 돌아와 엄마에게 그렇게 말했다. 소설을 열심히 쓰고 확실한 진로를 정해서 적어도 여름이 되기 전엔 직장을 잡을 계획이었다. 금방 여름이 되었고, 낯설던 가족과 화장실을 공유하는 게 익숙해진 나는 여전히 집에 있다. 부지런히 돌아가는 선풍기와는 달리 컴퓨터 앞에 멍하니 있는 시간이 많다. 살이 조금 찐 것 같다.


3년 다닌 직장의 퇴사 이유를 묻는 지인들에게 “생각도 좀 해보고, 글도 좀 쓰고, 언젠가 작가가 되고 싶어”라고 대답했다. 반년이 흐를 동안 생각이라기보단 걱정을 하는 날이 많았고, 글이라곤 푸념을 적어놓은, 어디 보여주기도 창피한 메모 같은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열심히 살지 못했다. 글쓰기에 대한 내 열정은 동경해온 작가들의 열정에 훨씬 미치지 못했다. 취업 정보를 알아보는 날이 많아졌다. 바탕화면엔 불합격한 자소서 파일이 늘었고, 통장에 모아둔 돈은 줄었고, 글을 쓰려고 산 노트는 여전히 많이 남아있다. 


“그래서 뭘 하고 싶다고?” 엄마의 질문에 대답 대신 한숨을 쉰 적이 여러 번이다. 엎어놓은 모래시계처럼 빠르게 흐르는 시간에서 숨고 싶다. 글쓰기 공부를 하려고 사둔 책이 하나씩 늘어갈수록 좁아지는 방은 숨을 곳이 되지 못했다. 답답하고 좁은 고치에 웅크린 애벌레 같은 나는 방을 나가고 싶다. 방을 탈출하고 싶다. 

쉽다면 쉬운 일이다. 매일 저녁이면 꿈틀대며 집은 나와 아파트 산책로를 도는 자유가 내게는 있다. 위대한 철학자와 시인들이 산책을 즐겼다지만, 산책을 한다고 위인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어떤 산책은 걸으면서도 컨베이어 벨트에 올라탄 부품 같은 기분이 들게 한다. 하지만 그 지겨운 산책이라도 일상에 비하면 숨통이 트이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고, 나는 나의 산책을 위로한다. 


제법 많은 사람들이 이 산책로를 걷는다. 그들의 산책은 나의 산책과 다르다. 직장이 있는 사람, 퇴근을 하는 존재들은 산책할 때 데리고 나온 강아지의 걸음마저 위풍당당하다. 그들이 부럽지 않은 적이 있었다. 대학생 때 나는 “<꽃들에게 희망을>이라는 책을 보면, 열심히 탑을 오르는 애벌레들이 나와. 열심히 경쟁해서 그 탑의 꼭대기에 선 애벌레는 탑이 그냥 애벌레들로 이루어진 탑이란 걸 깨닫지. 허무하지 않냐. 목적 없이 경쟁했던 거야. 나는 절대 그렇게 안 살 거야. 회사, 직장 이런 것 말고 꿈이 있어야 되지 않겠냐.” 지금은 그 책에 탑을 오르는 애벌레들이 묻는 듯하다. “애벌레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넌 한 번이라도 치열했냐?” 나는 대답을 하지 못한 채 허둥지둥 

걷는다.


문득 친구에게 전화를 해볼까 주소록을 뒤적인다. 전화를 걸면 아마도 “어~웬일?”하고 받을 것이다. 나는 “어~ 뭐 그냥” 하고 “잘 사냐?” 묻을 것이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잘 사냐는 질문은 잘살고 있는 사람이 하는 게 맞지 않을까. 잘 사는 녀석을 부러워하지 않고 그 녀석의 넋두리를 들어줄 더 잘 사는 사람, 못 사는 녀석의 하소연에 공감해줄 여유가 있는 사람. 다들 그런 사람이 못돼서 점점 연락이 뜸해지는 것 일까. 좋은 어른은 잘 사는 어른이다.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은 나는 

걷는다. 


멍하게 서있는 가로등을 따라가면 금방 아파트 입구다. 집 앞 가로등 바닥에는 불빛을 쫓던 나방들이 죽어있다. 인상을 찌푸린 나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나의 좁은 고치로 돌아왔다. 컴퓨터 앞에 앉는다. 조그만 탁상 거울엔 나가기 전과 비슷한 얼굴이 있다. 유심히 봐도 달라진 게 없다. 방은 그새 조금 더 좁아진 것 같다. 오늘도 외출할 뿐, 탈출하지 못했다. 나비가 못된 애벌레는 고치에서 굳어 죽는다는 걸 어디선가 읽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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