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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숲 Jul 07. 2020

[노래의말들] 편지 같던 노래와 라디오의 시간

노래의말들 10 칠레에서 온 편지/ 그 때 그 노래  

칠레 이스터섬, 미국 캘리포니아 대학 조 앤 반 틸버그 박사가 이끄는 발굴팀은 섬 주민들과 모아이 석상의 거대한 몸통을 발굴했다. 천년이 넘는 시간을 묻혀있던 석상의 미스터리가 풀리는 역사적인 순간, 긴 코를 가진 석상의 머리 아래로 10미터가 넘는 거대한 몸통이 드러났다. 그러나 발굴팀을 경악케 한 것은 수십 톤에 이르는 몸이 아닌, 몸통 아랫부분에 다소곳하게 달려있는 작은 손이었다. 그 작은 손엔 그 손의 손가락 한 마디 보다 작은 편지가 들려있었다. 천년이 넘는 시간을 땅에 묻혀 섬 부족들의 숱한 흥망성쇠를 보며 모아이는 편지를 쓰고 있었던 것이다. “도대체 어떻게 보내려고..” 발굴팀의 K는 탄식했다. 


그 해 여름 “이게 진짜 내 길인 것 같아” 기타를 메고 서울로 상경한 음악 청년은 알바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 원룸 우체통에 있는 흰 봉투 발견했다. ‘청년에게’라고 쓰인 봉투를 보고 그는 직감적으로 누군가 자신을 돕기 위해 보낸 돈이 아닐까 생각했다. 친척 중에 부자가 있었는지 기억을 더듬으며 조심스럽게 봉투를 뜯었지만, 흙 냄새가 나는 편지 한 장이 들어있을 뿐이었다. ‘무슨 일 있는 거니? 말해봐 이유는 없어도 돼. 때로는 괜찮아 나도 그냥 울어’ 대뜸 안부를 묻는 정체불명의 편지를 꼭 쥐고, 이상하게도 청년은 한참을 서 있었다. 청년은 답장하고 싶었지만 ‘칠레에서’라고 쓰인 주소 앞에 "도대체 어떻게 보내라고" 한숨 쉬었다. 잠시 후 방으로 들어온 청년은 기타를 꺼냈다. 편지를 펼쳐놓고 코드를 치며 노래로 불렀을 때, 편지 내용은 가사로 딱딱 맞아 떨어졌다. 장마철, 축축한 반지하 원룸 공기에 섞인 그 노랫말이 바다를 건너, 밤을 건너, 지구 반대 편에 있는 모아이에게 닿았을지는 반 틸버그 박사에게도 미스터리로 남아있다. 



칠레에서 온 편지 - 여름에

무슨 일 있는 거니? 말해봐. 이유는 없어도 돼. 

때로는 괜찮아. 나도 그냥 울어. 

사실 난 위로를 할 줄 몰라. 그냥 나 니 곁에 있어줄게.

아침이 오도록. 밤이 새도록. 있어줄게. 

때로는 나 깊은 밤 홀로, 어둠에 몸을 누인 채, 

지구 반대편을 상상하곤 해. 

때로는 나 밤이 새도록, 

얼굴도 본 적 없는 한 사람의 눈물을 상상하곤 해. 

아무 말 안 해도 돼. 그냥 너 내게로 기대면 돼. 

가만히 시간이 흘러가도록 기다리자. 

어쩜 우리 더 많은 밤을 혼자서 울며 잠들다 

나쁜 꿈을 꾸게 될지도 몰라. 

그래도 우리, 멀리 있어도 지구 반대편에 있대도 

서로의 아픔을 상상해주자.

말해봐. 괜찮아. 울어도. 괜찮아. 나도 그래. 


가사가 좋은 노래를 읽고 소개하는 개인방송 ‘노래의말들’을 한지 10회, 두 달 반이 흘렀다. 왜 노래를 소개하는 방송이었고 왜 하고 많은 채널 중에 오디오였나하면, 아마도 라디오에 대한 개인적인 향수 때문이겠다. 중학교 생활은 단조로웠다. 학교, 학원, 집을 반복하는 것이 딱히 힘들진 않았지만 그래도 늦은 밤 새벽이 오면 괜히 마음이 울렁였다. 혹시나 부모님이 깨실까 숨죽여 들었던 DJ의 목소리와 노래는 공허한 새벽 시간을 채웠다. 이상하게 전파를 타고 전국에 퍼지는 라디오를 들으며 DJ와 나 단둘이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매일 나에게 쓴 편지를 받는 기분, 그 고요히 설레던 밤의 시간이 모아이처럼 묻혀있다가 15년이 지난 지금 문득 발굴된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달라진 점은 지금은 누군가에게 편지를 쓰는 입장이 되었다는 것이다. 가사가 좋은 노래를 고르고 대본을 쓰는 마음은 지구 반대편에 나와 같이 힘든 누군가에게 편지 하는 마음과 비슷할 것이다. 따뜻한 노래와 괜찮다는 말, 지금 잘하고 있다는 말은 어쩌면 모두 나에게 하는 위로였을 테니까. 라디오를 준비하는 시간, 녹음을 하고 마우스로 딸깍딸깍 편집하는 시간도 어느샌가 시간 속으로 묻힐 것이다. 그리고 잊혀질 즘에 나에게 문득 편지를 보내 올 것이다. ‘무슨 일 있는거니?' 하고. 



가사 좋은 노래를 소개하는 라디오 '노래의말들' 이번 주는 여름에님의 '칠레에서 온 편지', 장기하와 얼굴들 '그 때 그 노래'를 읽었습니다. 방송은 아래 링크에서 들으실 수 있습니다. 


네이버 오디오 클립 

팟빵 : http://www.podbbang.com/ch/1775927?e=23589850


멜론 플레이리스트에서는 여태까지 노래의말들에서 소개한 가사 좋은 노래들을 들으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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