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을 돈으로도 살 수 있네
남편이 아침부터 190만 원 정도의 패딩을 사러 가자고 했다. 우아. 신난다. 여전히 겨우 패딩 하나를 이 정도의 돈까지 내며 산다는 게 잘하는 짓일까 싶지만 그래도 남편이 인센티브로 사준다고 한 거니까! 그냥 사기로 하고 집을 나선다.
한때 나는 돈으로 행복을 살 수 있다는 사실을 믿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 돈의 소중함을 어느 정도는 인정하고 받아들이게 됐다.
먹고 싶은 것을 마음껏 사 먹을 수 있을 정도,
예쁜 옷을 보면 살 수 있을 만큼,
가끔은 여행도 다니고,
읽고 싶은 책은 고민 없이 사면서,
인센티브로 거금이 생기면 명품도 하나 사볼까,
하는 생각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이 다름 아닌 돈이니까.
20대에는 돈만 벌면 여행을 다니고, 면세점에서의 명품 쇼핑을 즐겼다. 명품이 주는 기쁨과 가치는 빠르게 소멸했고, 여행 후 찾아오는 여독 역시 몇 달씩 카드값을 메꿔야 할 만큼 가치 있는 일로 여겨지지 않았다.
그래서 30대 초반에 “행복은 돈으로 살 수 있는 게 아니라“는 말도 안 되는 결론을 내리고 대학원 유학을 떠났다. 조금 모아놨던 돈으로 유학을 떠났던 참이라 그야말로 전재산을 탕진(?) 한셈이 됐다. 명품을 사거나 여행을 떠나는 것보다 훨씬 더 큰 배포를 가지고 제대로 된 한방을 날린 것이다. 유학 후에는 한국으로 돌아와 1년 동안 백수로 살았고, 결국 결혼자금도 없어 부모님께 손을 벌렸다. 돈의 가치와 소중함을 뼈저리게 느낄 수밖에 없던 시기였다. 30대에 백수라니. 30대에 무자본이라니. 처량한 신세. 돈의 가치가 더없이 소중하게 느껴지던 시기였다. 충분한 돈이 행복을 보장해 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했다.
40대에는 <세이노의 가르침>을 읽으며 절약 정신을 가져보자 결심했다. 내 인생에서는 처음 있는 일이었고, 그래서 대단한 결심이기도 했다. 남편에게도 최대한 허리띠를 졸라매고 돈을 모으자고 했지만 남편은 여행이 주는 기쁨은 쉬이 포기하지 않았다. 그래도 둘 다 각자 열심히 모으고, 주식 투자도 하며 자산을 늘려나가기 시작했다.
결국 돈이 행복을 보장해주진 않아도 행복할 수 있는 기본 조건은 충족시켜 준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물론 이 역시 언제든 바뀔 수 있는 생각일 테지만.
백화점에 도착하자마자 점심을 먹고, 버버리 매장에 가서 10분 만에 사고 싶은 패딩을 골랐다. 내가 패딩을 고른 시간보다 결제와 제품 포장에 더 오랜 시간이 걸렸을 정도. 남편의 카드 할인과 리워드까지 포함하면 내가 고른 패딩은 남편 기대에 부흥해 200만 원이 넘지 않는 금액이 되었다!!! 이리 보고 조리 봐도 너무 예쁘고 맘에 드는 패딩이다. 한파에도 춥지 않을 정도의 패딩은 아니지만 가볍고 모자도 달려 있어서 한동안은 이 옷에만 손이 갈 것 같다. 집에 돌아와 나도 들어갈만한 무지막지하게 큰 쇼핑백을 버리려고 접고 있는 와중에 남편이 명품 쇼핑백은 버리면 안 된다고 한다. 팔 수도 있다면서.
“엥?!“
이게 뭔 소리인가 싶었지만 실제로 당근에 들어가 보니 명품 쇼핑백이 5,000원에서 1만 원대로 올라와 있다.
와, 정말 놀라운 사실. 쇼핑백을 당근에 올려서 거래할 만큼의 열정은 없지만 바로 재활용 쓰레기통에 버리긴 조금 아깝네....
고이 접어 일단은 킵하기로. 결국엔 쓰레기통에 들어가게 될지라도.
결국 나는 필요한 것만 사면서 매달 일정 금액의 돈을 모으며 절약(?) 정신을 유지하는 삶도 좋고, 남편의 인센으로 가끔씩 명품 쇼핑을 즐길 수 있는 삶도 좋다. 이 생활 패턴이 서로 너무나 상반된 삶이라 해도 그렇다. 이런 사실을 인정하고 나니 마음이 가벼워지는 이유는 뭘까?
내가 소유한 명품들이 내가 지불한 (혹은 남편이 지불해 준) 돈만큼의 값어치를 하는지는 여전히 의문이지만 그래도 어제는 버버리 패딩으로 인해 충분히 행복한 하루였다. 따지고 보면 결국 돈으로 행복을 산 하루.
그 와중에 오늘은 브런치구독자 수가 1명 줄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구독자 수가 줄어들어서 발생하는 슬픔은 200만 원대 명품 패딩이 주는 기쁨으로 억누를 수 있는 것일까? 문득 궁금해지기도 한다. 버버리 패딩이 주는 기쁨과 구독자 수 감소에서 오는 슬픔은 별개의 감정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면서.
내가 이 브런치 연재북을 쓰고 있는 이유가 하루하루의 행복에 집중하고, 감사한 마음을 가지기 위해서였다는 사실도 잊지 말아야겠다. 그러니 구독자 수에 연연하지 말자. 패딩이 준 기쁨에 집중하자. 이 글을 올리는 와중에 구독자 수가 +1이 되었다! 대단한 기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