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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프로성장러 김양 May 12. 2024

좌충우돌 첫 학기 마감

어디서든 죽으란 법은 없으니까



드디어 운전면허를 따고, 중고차를 단 돈 3,000불에 구매했어요! 예산 범위 내에서 정말 잘 샀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국에서 타던 차도 아반떼였는데 여기에서도 같은 차종인 엘란트라를 만났으니, 이 차를 사려고 그동안 이렇게 힘들었던 걸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차와의 만남이 준비된 것처럼 느껴졌어요. 미국에 와서 기쁜 날이 별로 없었는데 차를 사고, 새 번호판을 달은 날만큼은 정말 행복했습니다. 이 차만 있으면 어디든 갈 수 있을 것 같았어요.



매일 몰아치는 읽기 자료와 과제, 발표와 시험도 어떻게든 버텨냈더니 끝이 보이기 시작했어요. 역시 어디서든 죽으란 법은 없구나, 아무리 힘들어도 이렇게 살아지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드디어 과에서 열리는 연말 파티를 마지막으로 첫 학기 일정이 모두 끝났습니다.



휴=3


안도의 한숨과 함께 한 달 정도 여유를 가질 수 있는 겨울방학이 왔어요. 돌아보니 힘들기만 했던 시간은 아니었더라고요.


아내가 한국어를 할 줄 안다면서 아내를 소개를 시켜준 과 친구도 있었고, 땡스기빙 때 혼자 있을 저를 배려해 가족 행사에 초대해 준 친구도 있었어요. 태어나서 처음으로 홈메이드 터키 고기도 맛보고, 다양한 종류의 파이까지 먹으며 제 입장에서는 땡스테이킹한 날을 보낼 수 있었지요.



과에서 하는 행사 역시 웬만하면 다 참석하고자 했습니다. 수업과 관련된 다양한 정보를 얻을 수 있기도 했고, 무엇보다 이방인처럼 보이고 싶지 않았거든요.


살이 익을 정도로 뜨거운 햇살이 누그러드는 가을날 과 친구들과 함께한 potluck 파티는 새로운 경험이기도 했고, 날도 좋아서 난데없이 기분이 고조되기도 했어요. 따스한 햇살과 끊이질 않는 대화 속에서도 여전히 이방인처럼 느껴지던 나 자신과 어떻게든 한 마디라도 나누고 싶어 하는 이방인에 대해 호기심이 가득한 자, 저 이방인은 뭐지? 하며 경계하는 눈초리까지, 이 모든 것들이 한데 어우러진 부조화가 또 있을 수 있나, 싶은 날이기도 했지요.



과 특성상 그룹 과제가 정말 많았는데 제가 작성한 부분을 같은 그룹의 친구들이 영어로 말이 되게끔 바꿔주니 그것도 제겐 큰 공부가 됐어요. 누군가 제가 작성한 엉터리 영어를 한 번 수정해 준 것이니까 다시 읽어보며 이렇게 작성하는 게 더 말이 되는 영어구나, 생각하며 공부할 수 있었죠. 같이 작업을 한 친구들은 대부분 선량하고 외국인에게 관심이 많은 친구들이어서 정말 다행이었어요.


"네 이름을 어떻게 발음해? 철자는 아는데 어떻게 발음하는지를 잘 몰라서"


"나는 살면서 이 동네를 벗어난 적이 없는데, 한국에서 여기까지 공부를 하러 오다니 정말 대단하다. 어떻게 용기를 낸 거야?"

- 글쎄, 나는 외국에서 한 번 살아보고 싶었는데.... (매일 같이 괜히 온 게 아닐까 생각해)


"이 부분은 내가 조금 더 말이 되게 바꾸려고 하는데 괜찮을까?"

- 그럼, 얼마든지


1학기 내내 저는 아무런 생각이 없는 학생이었고, 자기 주장은 더더욱 할 수 없었습니다. 수업 시간 내내 귀머거리처럼, 또는 벙어리처럼, 아무 말도 못 알아듣고,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제가 어떤 의견을 내고 어떤 생각이 옳은지 판단할 수 있었을까요? 그저 어떻게든 2년을 잘 버티고, 학위를 따서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뿐이었어요.




겨울방학 중에는 남자친구가 휴가를 내고 놀러 왔습니다. 공항에서 얼굴을 보자마자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내렸어요.


하고 싶은 말이 정말 많았는데, 밤을 새워가며 이야기할 수도 있을 것 같았는데 저는 갑자기 벙어리가 된 것 같았어요. 영어로는 제대로 된 의사전달이 안된다 해도 한국말까지 잊어버린 건 아닌데, 우리가 공감하고 나눌 수 있는 이야기가 지나치게 제한적이라는 사실을 금방 알아차리겠더라고요.


‘여기는 미국이고, 노스캐롤라이나라는 주야. 약자는 NC인데 주기가 있는 줄도 몰랐네. 미국에서는 주가 독립적으로 기능해서 하나의 나라같기도 하다는 말이 사실인가봐. 이 동네에서 제일 유명한 사립학교는 듀크지만, 우리 학교는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공립학교라서 사실 미국에서는 더 유명해. 난 아직도 내가 여기서 뭘 하고 있는지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버틸거고, 무조건 학위는 받아서 돌아갈 거야’


무슨 말이든 하고 싶었지만 결국 학교 얘기, 이곳에서 사는 얘기는 아무것도 나누지 못했어요.



30 일가량 되는 겨울방학 중 10일은 남자친구와 사바나를 거쳐 플로리다까지 운전해 내려갔어요. 플로리다는 늘 여름처럼 따뜻한 도시라고 들었지만 12월의 올랜도는 약간 서늘하게 느껴졌습니다. 아침, 저녁으로는 겨울처럼 춥기도 했고요. 디즈니랜드, 유니버설 스튜디오와 아울렛까지 여행객이 즐기는 다양한 장소를 돌아다녔지만 그다지 즐겁지가 않았어요. 당시의 저는 여행을 즐길 마음의 여유가 1도 없는 상태였습니다. 집에서 조용히 쉬면서 지친 마음과 머리를 재충전하고 싶었어요. 하지만 제가 살고 있는 동네는 여행객 입장에서 매우 지루한 도시였습니다. 전통적인 역사 도시라는 생각이 들어 꼭 남자친구와 다시 와봐야지, 했던 곳들도 함께 가니 동네 마트 같았고, 주도라 대도시처럼 느껴졌던 롤리의 박물관도 시시하기만 했지요.



나에게는 그저 전쟁터와 같이 하루하루를 힘들게 버텨낸 이곳이 그에게는 행복한 여행지였을 테지요? 그건 마치 전쟁터에서 피를 흘리고 있는 누군가에게 다가와 "나는 그래도 이곳이 좋아"라는 말을 하는 것과 다르지 않을 것 같았어요. 매우 극단적인 예라 해도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는 이곳에서 같이 피를 흘려주거나 아니면 내 피를 닦아주거나 그것도 아니라면 적어도 내 땀이라도 닦아줄 누군가가 필요해.....'


우리의 삶 자체가 달라졌고, 생활 무대도 변했다는 사실이, 우리 사이의 끝을 보여주는 것 같아 씁쓸해졌습니다.


이 상황을 정면으로 마주할 용기도 없고, 무조건 도망가고 싶지만 학위 없인 절대 돌아갈 수 없을 것 같은 제 심정을 저도 정확하게 설명할 수 없는데 누구의 이해를 바랄 수 있었을까요? 차라리 이 말도 안 되는 스트레스가 나를 잡아먹어 죽게 만들면 시체가 되더라도 한국엔 갈 수 있겠구나, 라는 황당한 생각까지 했는걸요.


천국이든 지옥이든 가본 적은 없지만 차라리 죽으면 그게 천국일 것만 같은 시간도 있었지요. 이곳에서는 아무도 나에게 잘못했다고 말하지 않는데 저 스스로 한걸음 한걸음 내딛는 것 자체가 고통처럼 느껴졌어요. 잘하고 싶은데, 아무리 노력해도 넘을 수 없는 언어의 장벽이 제가 가고자 하는 모든 길을 가로막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그 와중에도 진심을 다해 노력했어요. 원래도 별로 즐기지 않았던 공부를 왜 여기서 그렇게 열정적으로 하고자 했는지 잘 모르겠을 정도로요.


그저 잘하고 싶었습니다. 같은 학년에 유일한 한국인이었으니까, 나는 그 많은 지원자 중에서 선택받은 한 사람이니까, 마치 대한민국의 얼굴이 된 것처럼 그저 모범을 보이고 싶었던 것 같기도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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