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돌아가도 될까요?
미국은 다양한 인종이 모여 세워진 다민족 국가라고 배웠어요. 언어 역시 실리 추구를 위해 영어를 선택했을 뿐 고유한 언어도 존재하지 않는다고요.
미국에서는 누구나 이방인이라고, 그래서 누구든 환영받을 수 있다고요.
하지만 학교에서는 첫 학기가 시작되기 전부터 어떤 환영도 받지 못하는 기분이 들었어요.
외국인 학생이라면 치러야 하는 영어 시험 날짜가 학과 오리엔테이션과 같은 날이더라고요. 당연히 과 오리엔테이션엔 참석도 하지 못했습니다.
이후에도 예상과 다르게 어마무시한 언어 장벽과 문화 차이가 엄청난 스트레스로 다가왔어요.
"Thank you" 라고 말하면
“Sure" 이라는 답이 가능한 언어,
도서관에 앉아 있으면 앞에 앉아있던 누군가가
“Can you watch my stuff?" 라고 물어보는 게 아무렇지 않은 학교 생활 같은
사소한 것부터 대학원 수업 따라가기라는 고난이도의 중대한 적응까지, 모든 것들이 제 삶의 발목을 잡는 기분이 들었거든요.
교수님과 학생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토론이 일상인 대학원 수업은 전혀 알아들을 수 없어 하루하루의 일상이 너무나도 버겁게 느껴졌습니다.
수업을 마치고 집에 오면 그대로 침대에 쓰러져 한두 시간은 자고 일어나야 정신이 돌아오는 나날들이었어요.
Urban Spatial Structure
Research Methods
Microeconomics
Theory of Planning
첫 학기에 필수로 들어야 하는 4과목 모두 매주 과제가 있거나 읽기 자료가 200페이지 이상.
이 분량을 대체 어떻게 다 읽고 이해하나 싶어 절망적이었습니닼 대부분의 읽기 자료가 논문이나 학술서적이라 한국어로도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들이었어요.
“That's just how it works. Everyone takes the four courses"
도저히 수업을 못 따라가겠다고 어드바이저에게 부러지는 영어로 겨우 겨우 이야기했더니 이런 답변이 돌아오더군요. 갑자기 눈물이 봇물 터지듯 쏟아져 내렸습니다. 당황한 교수님이 박사과정 중에 한국인 학생이 있으니 모국어로 이야기해보지 않겠냐고 제안하더군요.
내 나라 한국, 내 나라 언어 한글이 너무나도 그리웠어요.
결국 가장 버겁게 느껴졌던 “Theory of Planning" 수업을 드랍시키기로 했습니다. 이미 수강 변경 기간이 지나 드랍만 가능한 상황에서 담당 교수님의 승인이 필요했어요. 이메일로 구구절절 제 상황을 설명하고 미팅 날짜를 잡았습니다. 교수님은 당연히 서류에 사인을 해주셨고 심리상담 프로그램까지 추천해 주셨어요.
영어를 제대로 말하고 알아듣는데 한계가 있을 텐데 상담을 받는다고 과연 정신적 안정에 도움이 될까 의문이 들었습니다. 그래도 공짜라고 해서 한 학기 동안 주 1회씩 상담을 받기로 했어요. 내심 영어 실력 향상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거든요. 심리적 위로는 힘들 거라는 예상과 달리 정신과 의사와 단 둘이 조용한 공간에 머무르며 이야기를 나누니 그 시간만큼은 평화롭기도 했어요. 미국에서 친구 사귀는 법, 영어로 대화를 시도하는 법, 심적 위안이 되는 글 등을 소개받아 열심히 읽었습니다.
그즈음부터 학비를 내는 만큼 학교에서 누릴 수 있는 복지를 모두 누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요가수업도 듣고, 그룹 상담도 받았어요. 라이팅 센터에서 받을 수 있는 첨삭과 조언도 요청했고요. 글로벌센터에서 나눠준 리플릿을 보며 더 참여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 없는지 뒤적였습니다.
영어로 말하고 듣는 능력을 향상시킬 수 있는 일이고, 돈이 들지 않는다면 뭐든 망설이지 않고 참여하고 싶었어요. 학교에서 한국인 친구를 사귀는 것은 힘들 것 같고, 어떻게든 이 사회에서 조금의 소속감이라도 느끼고 싶었거든요. 그래서 동질감을 느낄 수 있는 친구를 더 많이 사귀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 와중에도 롤러코스터를 타듯 오르내리는 감정의 변화는 종잡을 수 없이 이어졌습니다. 심리 상담을 받을 때에는 안정됐던 마음이 수업을 듣는 중에는 다시 지하로 내리 꽂히는 기분이 들었거든요.
우연히 한 교류 프로그램을 통해 알게 된 친구 한 명은 주기적으로 잘 지내는지 연락하고, 만나기도 하며, 친분 관계를 쌓아나가고 있었는데 페이스북에 올라온 결혼 소식을 보고 실망스러웠어요. 결혼 소식을 미리 알리지도 않았고, 초대는 더더욱 받지 못했거든요. 그 친구에게는 저를 만나는 일이 그저 봉사활동의 일부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지요.
“내가 누구를 돕고 있다거나 누구에게 봉사하고 있다는 성취감만큼 상대를 우울하게 만드는 감정도 없다. 그것은 때로 상대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입히곤 한다”
김경일 님의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의 책 내용이 떠올라 더 비참한 심정이 들었습니다.
마음을 나눌 친구가 한 명이라도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간절했던 것뿐이었는데.
그 와중에 마주한 좌절로 인해 나약해질 대로 나약해진 마음이 더 무너져 내렸어요.
***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별 일이 아니기도 하고, 미국의 결혼 문화가 우리나라와는 다소 다른 면도 있어서 이제 충분히 이해가 되기는 합니다. 당시 제가 낯선 문화 적응에 어려움을 겪고 있어서 더 힘들게 다가왔던 것 같아요 ***
공항 팻말이 보일 때마다 그곳을 향해 달려가고 싶었습니다. 마음만 먹으면 10분 만에 짐을 싸서 이곳을 떠날 수 있을 것 같았거든요.
“너무 힘들면 돌아와요. 다시 받아줄 테니까”
퇴사할 때 마지막으로 CEO 면담을 했는데 그때 들었던 말이 계속 귀에서 맴돌았어요. 해외 유학 경험이 있으셨던 대표님이었는데 그래서인지 힘들 거라는 걸 어느 정도 예상은 하셨었나 봐요.
‘저 정말 다시 돌아가도 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