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들 잘 지내고 있어요
7월 31일,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었습니다.
3월에 입사한 회사였고, 더 다니고 싶을 정도로 애정이 넘쳤지만 미국 대학원이 더 가고 싶었습니다. 중요한 선택의 기로에 서면 늘 시도해보지 않은 새로운 일을 해보자는 주의였거든요.
그리고 8월 10일에 떠나는 미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어요. 빠듯한 재정 상황을 고려해 무려 두 번이나 경유하고 24시간 만에 미국땅을 밟는 일정이었습니다.
최종 목적지는 이름도 희한 찬란한 롤리-더햄 국제공항.
한국인이 많지 않은 지역이라 들었는데 하루 정도 신세 질 수 있는 지인이 롤리에 거주하고 있어 다행이었습니다. 마치 구세주가 나타나기라도 한 것처럼 기뻤어요. 그분이 늦은 저녁시간에 공항까지 픽업을 나와주었고, 기꺼이 방도 하나 내주었거든요. 카펫이 깔린 방에 담요를 깔고 누워 멀뚱멀뚱 천장을 바라보고 있자니 잡생각이 떠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여기에 오기로 결정한 내 모든 선택이 잘못된 것이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이 쓰나미처럼 몰려왔어요.
잡생각이 피곤함을 이기진 못했습니다. 이 집의 조명은 왜 이렇게 죄다 노란색인거지, 하는 생각을 끝으로 깊은 잠에 빠져 들었지요.
다음 날, 바로 집부터 계약했습니다. 한국에서 부동산 사이트를 뒤져 찾아낸 가장 저렴한 아파트였어요. 월 560달러에 방도 하나 있고 면적도 꽤 커서 별 고민 없이 계약을 결심한 집이었지요. 미국에 오기 전 매니지먼트 오피스와 이메일을 주고받으며 유닛 하나를 계약하기로 얘기가 끝난 상황이었습니다.
(12년이 지난 지금 같은 집, 동일 면적의 렌트비가 1,215불까지 뛰었더군요.)
나 혼자 살 건데 상태가 좀 안 좋으면 어떤가,
학교를 다닐 수 있기 거리에만 있으면 되는 거지.
이 정도로 저렴하면서 면적도 큰 집은 찾을 수 없을 거야, 하는 생각이 전부였어요.
한국에서조차 혼자 살아본 적이 없기에 지나치게 무지하고 용감했던 거죠.
집 계약을 하러 가기 전 은행에 들러 계좌를 오픈하고, 데빗카드도 받았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체크카드였지만 미국에서는 데빗카드라는 단어를 쓰더군요.
집을 계약하면 바로 짐을 가지고 들어갈 생각이었으므로 차를 렌트하고 짐도 실었습니다.
“내비게이션도 주세요”
라고 말했지만 렌터카 직원이 전혀 알아듣지 못하더군요. 지인에게 물어보니 내비게이션은 미국에서 GPS라고 한다고 알려줬어요.
데빗카드, GPS, 두 개의 영단어를 배운 의미 있는 날이었습니다.
앞으로 갈 길이 험난해 보였지만 새로운 환경에서 새롭게 시작한다는 기대감도 있었어요.
집 계약을 마치고 이민 가방까지 옮겨 놓으니 머나먼 이국땅에서 완전하게 독립했다는 사실이 실감 나기 시작했습니다.
차량 렌트비가 꽤나 비싸서 빨리 저렴한 차를 사고 렌터카를 반납해야 했어요. 그래서 월요일이 되자마자 면허 시험을 보러 갔지요. 그!런!데! “STOP" 사인 뒤에서 멈추지 않았다는 이유로 도로에는 나가보지도 못하고 시험장으로 다시 돌아왔어요. 실기시험에서 똑 떨어진 거죠. 면허시험에 떨어지면 1주일 뒤에나 재시험을 볼 수 있다고 해서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렌터카 비용과 다음 주에 학기가 시작되는 학교 일정 등을 고려했을 때 운전면허 시험을 위해 1주일을 더 기다려야 한다는 사실이 너무 막막하게 느껴졌거든요.
그래도 정신을 차려야 했어요. 집은 여전히 텅 비어있고, 먹을 것, 심지어 마실 물조차도 없었으니까요.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 월마트에 가서 미국 마트엔 뭐가 있나 둘러보고, Target에 가서 당장 필요한 책상과 의자, 책장을 샀어요. DIY 제품을 꾸역꾸역 차에 실어 집까지 겨우 겨우 옮겨놓았습니다. 상자를 뜯을 힘도 없어 거실에 그대로 내팽개치고 잠이 들었어요.
이른 저녁에 잠들어서인지, 시차가 엉켜서인지 새벽녘에 눈이 번쩍 떠졌어요. 갑자기 고독하고, 외로워졌습니다. 학교는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다시 한국에 돌아가고 싶어졌어요. 낯선 땅에 혼자 있는 게 너무 무서워 하염없이 눈물이 흐르더라고요. 이렇게 미국에 오자마자 다시 한국이 그리워질 줄은 꿈에도 몰랐어요.
'나 이제 어떡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