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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씨방 Nov 22. 2018

왜 그 모양으로 생겨먹었니?

주머니탐구생활#00. 그래서 한다

# 김씨방

나는 기획자다. 간행물을 기획하고, 취재를 하고, 다른 사람의 글을 고친다.

10대, 20대 초반에 꿈꾸던 내 모습과 지금의 내 모습은 많이 다르다. 이 나이쯤 되면 적어도 책을 한 권 내고, 강의를 하고, 작업실에서 글을 쓸 줄 알았다.


스무살 때 한 수업에서 미래의 계획을 세웠다.

종이에는 ‘5년, 10년, 20년 이후의 나는 어떤 모습일까, 어디서 누구와 무엇을 하고 있을까’라는 구체적인 질문이 있었고, 구체적으로 답했다. 10년이 지났지만 그 종이를 가지고 있다. 단지 어디 뒀는지 잘 모르고, 굳이 찾아서 부끄러워하고 싶지도 않다.


일기, 편지, 계획을 다시 펼쳐보는 건 부끄럽다.

하고자 하는 일들을 적은 것뿐인데, 그 순간의 진심을 적은 것인데, 막상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철없고 순수했다기보다 ‘그 당시의 마음에서 많이 멀어졌다’는 부끄러움이다. 지키지 않은 마음들은 가끔 잠꼬대같이 느껴진다. 말하자마자 사라질.


어떤 꿈은 잠꼬대에 그치고, 어떤 꿈은 동기부여가 된다.

관점에 따라 다르겠지만, 일기, 편지, 계획을 다시 펼쳐봤을 때 ‘막연하다’거나 ‘허무맹랑하다’는 인상을 주지 않으면 그만이다. 그러려면 뭐, 일단 지르고 보는 거다. 적어도 될 줄 알았던 모습에 가까워지기. 내 곁엔 베개와 담요 대신 노트북과 사유.



# 사유

사유는 디자이너다. 간행물을 디자인하고, 브랜딩을 하고, 그림을 그린다. 

나와 사유는 회사에서 만났다. 같은 간행물을 작업하면서 몇 마디 말을 나눴다. 대체로 “언제까지 주세요?”라거나 “내일 오전까지 가능할까요?” 하는 식의 채권자와 채무자 간의 말들이었다. 그러다 술을 먹었다. 당시 그녀의 말을 빌리자면 “인쇄 기념”이었다. 기념할 게 별로 없는 나날이었다. 첫 술자리에 소주 5병씩을 먹었고, 비틀거리며 귀가했다. 돌아오는 길에 생각했다. ‘코가 꿰었다’고.



# 주머니탐구생활

김씨방과 사유가 끄집어낼 주머니 속 이야기.

주머니에는 무엇이든 집어넣을 수 있다. 일회용 빨대 포장 비닐, 껌 종이, 술집 영수증, 금요일 5시에 일거리를 던져준 클라이언트의 말, 월요일 회의 안건, 다시 술집 영수증 등등. 주머니는 넣는 만큼 부풀어 오르고, 또 무엇을 넣느냐에 따라 모양이 달라진다. 어떤 때는 뾰족해지고, 또 어떤 때는 둥글둥글하다. 삐져나올까 터질까 걱정되기도 한다. 그래서 주머니를 뒤적거릴 때, 내가 무엇을 먹고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알 수 있다. 주머니는 나와 네가, 우리가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는 단서가 된다. 사유는 퇴근 후 술로 주머니를 채운다. 주머니가 가득 차면 아이패드에 그림을 그린다. 사유는 술 얼룩 같은 그림을 한아름 가지고 있다. 나와 너는, 우리는 저마다의 취향, 습관, 말버릇으로 생겨먹었다. 아주머니부터 술주머니까지,


그래서 질문한다.


왜 그 모양으로 생겨먹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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