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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씨방 Nov 22. 2018

방이 필요해

주머니탐구생활#01. 카페쿠폰

지난해 입은 패딩 주머니에 카페 쿠폰이 들어 있었다. 

카페 쿠폰은 시도 때도 없이 나타난다. 책을 펼치면 책갈피처럼, 긴 자로 서랍 바닥을 긁으면 십 원짜리 동전처럼. 나는 시도 때도 없이 카페에 간다. 카페에서 드라마 역주행을 하고, 계획을 세우고, 책을 읽고, 일을 하고, 가끔 울고, 대체로 멍하니 앉아 있다. 요즘 트렌드가 ‘홈카페족’이라지만, 나는 오늘도 카페로 간다.


서른 살이 되도록 온전히 내 공간을 가져본 적 없다. 

우리는 한 방에서 얽혀 지냈다. 언니들과 한데 누워 잠을 잤고, 새벽 일찍 일어나야 할 때는 언니가 내 알람을 끄지 않을까 전전긍긍했다. 한번은 애인에게 목각인형을 선물 받았다. 선반에 고이 올려뒀는데 며칠 가지 않아 사라졌다. 여자 네 명이 지내기에 그 방은 좁았고, 서로의 편의에 따라 물건의 위치도 자주 바뀌었다. 전화통화를 하고 나면 언니들은 “그래서 어떻게 됐어?” 하고 물었다. 도통 누구랑 대화하는지 알 수 있어야지. 덕분에 언니들이 언제 애인과 싸웠고 무엇 때문에 싸웠는지, 누가 먼저 사과를 했는지도 알 수 있었다. 사춘기가 온 이후부터는 전화통화를 하려고 동네를 두 바퀴씩 돌았다.  


그래도 몇 번은 ‘내 방’이라고 부를 만한 장소가 있었다. 

한 번은 창고로 쓰던 옥상 단칸방에 이불을 폈다. 엄마 친구네가 세 들어 살던 방으로, 오래 비워둔 탓에 냉기가 돌았다. 바깥문과 방문이 달려 있었는데 모두 잘 닫히지 않았다. 단칸방 한켠에 상자를 몰아넣고 책상을 들였다. 거기 언니가 미술 시간에 만든 액자를 걸어놓고 뿌듯했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오래 가지 않았다. 잠자리에 누웠는데 방문 밖에서 ‘찍’ 하는 소리가 들렸다. 소리는 점점 불어나 내 꿈을 갉아 먹었다. 기어이 방안에서까지 소리가 들려왔을 때, 나는 1층으로 내달렸다. 몇 주 만에 찾은 단칸방에는 액자가 널브러져 있었다. 다른 한 번은 돌아가신 할머니 방이었다. 반투명 미닫이문이 달려 있었고, 문을 닫아도 문밖에서 누가 기웃거리는 게 훤히 보였다. 그마저도 잘 닫히지 않아 내내 열어두고 지냈다. 그 방으로 엄마가 오고, 조카가 오고, 형부가 오고, 가끔 얼굴 모를 손님도 기웃거렸다. 기타를 산 지 두 달 만에 넥이 부러졌지만 아직도 누가 부러트렸는지 모른다.



늘 열린 문으로 늘 무엇인가 누군가 들어왔다. 

닫힌 문. 그 안에 대한 동경이 있다. 포스터를 붙이고, 일기장을 펼친 그대로 두고, 영화 한 편을 끝까지 보고 싶다. 오늘 벗어둔 외투를 내일 그대로 입고 싶다. 그냥 발가벗고만 있어도 좋겠다. 공간의 크기보다 중요한 건 닫힌 문안의 공간, 그러니까 자기만의 공간이 있다는 사실이다. 물건을 옮겨버린 것도 나 자신이고 깨버린 것도 나 자신인. 머릿속으로 나만의 공간을 그림 그리다 얼마 못가 지운다. 포스터와 일기장과 노트북은 그려지지만, 그것들을 몰아넣을 벽이 그려지지 않는다. 어쩌면 자신만의 공간이라는 것은 믿음에 가까울지 모른다.


나는 문안의 공간을 찾아다닌다.

머릿속으로 벽을 떠올려보자. 널따랗게 펼쳐진 벽에는 문 하나가 달려 있다. 문을 열면 침대와 책상과 옷장이 보인다. 다시 문을 닫는다. 여기에 한 사람을 더 떠올려보자. 누군가 침대에 앉아 있다가 문을 열어제낀 나를 본다. 문이 닫히고 나는 그 사람의 시야에서 사라진다. 나는 문 밖에 있는 사람일까, 안에 있는 사람일까? 적어도 밀려난 사람이고 싶지 않다. 그래서 한 걸음 한 걸음 ‘문안’이라는 믿음으로 내딛는다. 나는 매일 문을 열고 ‘문안’의 긴긴 공간을 배회하는 중이다. 그러는 동안 카페의 이름이 바뀌고, 1인용에서 4인용까지 테이블의 크기가 바뀌고, 다시 ‘문밖’으로 귀가한다.   


집을 나오는 것에 ‘쉰다’라는 표현을 쓰기 시작했다.

“취미가 뭐예요?” 하는 질문에 나는 이렇게 답한다.


집에서 나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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