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머니탐구생활#02. 참치통조림
주머니 가득 음식을 넣고 귀가한다.
참치통조림, 3분 카레, 맥주. 냉동실에 맥주를 얼리는 동안 샤워를 한다. 오늘의 메뉴는 참치 비빔밥이다. 수건으로 젖은 머리카락을 말아 올리고 식탁 앞에 앉는다. 식탁의 형태는 자주 바뀐다. 컴퓨터 책상부터 소파 팔걸이, 잡지 사은품으로 받은 1단 책장까지. 우리는 다른 식탁을 쓴다.
옛집에는 커다란 식탁이 하나 있었다.
실내에 마당이 있는 집이었다. 부엌과 화장실을 가려면 신발을 신어야 했고, 겨울마다 연탄을 지폈다. 아버지는 파주에서 일터까지 자전거 타고 다니던 이야기를 하며 ‘서울에서 이런 집 한 채 얻기 힘들다’고 연신 강조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어쩌다 아파트에 사는 친구 집에 가면 부러 오래 머물렀다. 중학교에 들어갈 즈음 그 집을 대수선했다. 이후 집에는 몇 가지 변화가 생겼다.
하나, 벽이 부풀었다.
컨테이너 벽을 세워 여름에는 덥고 겨울에는 추웠다. 곰팡이가 잘 슬어서 벽지가 울었는데, 얼핏 벽이 부풀어오르는 것처럼 보였다.
둘, 손님이 늘었다.
방음이 되지 않아, 벽 쪽으로 머리를 대고 누우면 밤마다 어떤 여자가 꿈속을 또각또각 걸어 다녔다. 누군가는 죽여버린다 했고, 다른 누군가는 가지 말라며 울었다.
셋, 문을 열고 들어온 손님도 있다.
대수선에 참여한 한 인부는 사장이 임금을 주지 않는다며 거실 바닥을 도끼로 내리찍었다. 아버지는 인부와 소주를 몇 병 마시더니 돈 봉투를 들려 보냈다.
새집에서 새출발 할 수 있을 거라는 바람이 어느 정도 잦아들 즈음, 아버지는 식탁을 주문 제작했다. 그건 누가 봐도 4인용 식탁이었다. 할머니와 아버지, 어머니, 언니들, 그리고 나는 어슷하게 앉아 밥을 먹었다. 아버지는 그 식탁의 튼튼함과 반짝이 풀을 발라놓은 것 같은 광택, 널따란 크기에 대해 이야기했다. 밀어낸 사람도 없는데 모두들 밀려난 사람처럼 위태로워 보였다. 꼭꼭 삼켰다.
식탁에는 몇 가지 반찬과 밥이 올라왔다. 국은 있을 때도, 없을 때도 있었다. 아버지는 식탁에 숟가락을 세게 내려놓으면 크게 화를 냈다. 자주는 아니지만, 기분이 안 좋을 땐 스댕 그릇이 날아왔다. 스댕 그릇에는 물이 찰랑하게 담겨 있었고, 언니들과 나는 가끔 젖었다. 부러 하루의 일과를 말하지 않는 것, 위태로운 사람에게 어떤 말도 위태로워질 수 있다는 것을 그때 배운 것 같다. 당시 드라마를 보면 식사 후 꼭 소파에 둘러앉아 과일을 먹었다. 그래서 단정하게 깎은 사과와 멜론 같은 과일에 낯설음을 느꼈다.
20년 넘게 산 집을 떠났다.
우리는 이전 집주인이 남기고 간 식탁을 쓴다. 식탁이 한 번 바뀌는 동안 할머니가 떠났고, 아버지가 조금 작아졌다. 나는 키가 부쩍 자랐다. 언니들은 결혼했고, 아버지와 어머니와 나는 직장에 다닌다. 우리는 같은 식탁을 쓰지 않는다. 내가 회사를 다니기 시작할 즈음, 그러니까 우리가 각기 다른 시간에 귀가하고 다시 집을 나서기 시작한 때부터였던 것 같다.
더 곰곰이 생각해보면 아버지를 좋아할 수도, 미워할 수도 없게 된 때부터였던 것 같다.
아버지가 식탁에 앉으려고 하면, 나는 한입 가득 남은 밥을 욱여넣었다. 한두 번 하다가 결국 거실에 따로 상을 펴거나 그릇에 밥과 국 건더기를 덜어 방으로 향한다. 아버지와 한 식탁에서 밥 먹는 일을 상상하면 숨이 턱 막힌다. 아버지는 더 이상 스댕 그릇을 던지지 않는다. 하지만 좋아할 수 없다. 내 기억 속 아버지는 4인용 식탁을 매만지던 모습 그대로 멈춰 있다, 남에게는 인심 좋지만 가족에게는 인색한 아버지, 말이 거친 아버지. 미워할 수도 없다. 식탁을 매만지며 잘 살고 있다고 위로하던 아버지, 언젠가는 인심이 돌아온다고 여기던 아버지, 홀어머니 밑에서 자라 아버지의 역할을 몰랐던 아버지, 거친 현장에서 일하던 아버지.
반찬을 만들어놔도 고루 먹지 않아 곧잘 쉬었다.
어머니는 ‘먹어치워’라는 말을 자주 했다. 이제는 예전만큼 반찬을 자주, 그리고 많이 만들지 않는다. 반찬의 가짓수가 적다는 것은 참 간편한 일이다. 일일이 반찬통 뚜껑을 열어 내용물을 확인하지 않아도 된다. 좋아하는 반찬 한 가지만 먹을 수도 있다. 또 식사 시간이 짧아진다. 간편하게 한 끼를 준비해 더 간편하게 먹어치운다. 식사는 식사. 허기를 달래려고, 헛헛함을 누르려고 밥을 먹는 일에 익숙해진다. 간소한 식사는 장소를 가리지 않는다. 소파, 침대, 무릎.
어째 점점 움츠러든다.
옛집에서 식사할 때는 무슨 말을 주고받았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지금은 어쩌다 함께 식사를 해도 서로 휴대전화를 보거나, 빨리 ‘먹어치우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이 집은 회전율이 빠르다. 한 살, 두 살 나이를 먹으면서 많은 게 익숙해진다. 거짓말을 하는 것, 거짓말인 걸 알아채도 덤덤하게 받아들이는 것, 업무에 익숙해지는 것, 다른 데로 도망가고 싶은 생각이 드는 것, 사람과 사귀고 헤어지는 것. 익숙해진다는 이유로 굳이 화제를 꺼내지 않는다. 익숙하다는 이유로 내게 일어난 크고 작은 일을 ‘먹어치운다’. 가끔 음미하고 싶을 때가 있지만, 잘 잊어버린다. 밀린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봐야 하고, 잠을 자야 한다. 빨리 먹어치우고 다른 일을 해야 한다. 많은 식사로 입안이 가득 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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