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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씨방 Dec 13. 2020

201213

오만 원짜리 낙서


오늘의 비움, 취중 사주풀이

나는 술을 좋아한다. 이따금 점보는 것도 즐긴다. '아버지, 날 보고 있으면 정답을 알려줘' 하는 외침보다는, 삶이 무료해서 스스로에게 작은 이벤트를 선물하는 거다. 그날은 모두 이뤘다. 그날, 오후 다섯 시에 사주 예약을 했다. 그리고 점심에 언니와 삼겹살 집에 갔다. 반주로 한 병 시킨 소주가 두 병, 세 병, 그리고 네 병에 이르렀다. 언니와 사이좋게 두 병씩 나눠 마시고 사주풀이집으로 갔다. 술 먹은 채 가는 게 민폐인 걸 알면서도 몇 시간 전 약속을 어기는 것도 민폐라며, 나와 내가 몹시도 싸운 날이다.


역술가는 내게 종이를 주며 자기가 하는 말을 받아 적으라고 했다. 이성은 있지만 정신은 없었다. 일단 받아 적었는데 다음날 들여다보니 단어와 단어가 연결되지 않았다. 기억나는 건 내가 아주 좋은 불의 기운을 가졌다는 것과 흙의 기운을 가진 사람을 만나라는 말. 내가 아주 좋은 불인데 토질이 안 좋았나 보다. '토질이 안 좋다'라고 쓰여있지 않던가. 그런데 불이랑 흙이랑 연관이 깊은가. 기억나는 게 또 있다. 서른여덟까지 결혼 안 하면 평생 어렵다는 말도 했는데, 내가 이 질문을 했던가? 이런저런 추측을 하며 책 사이에 껴두었다. 몇 달이 지나도록 완성하지 못하고 결국 이 단어, 아니 낙서를 비운다. 술은 때와 장소를 가리며 마시자, 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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