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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씨방 Dec 14. 2020

201214

첫 유럽 여행 비상 꾸러미

(왼) 꾸머리를 다 꺼내고 보니 (오) 유통기한 기난 것들이 보인다


오늘의 비움, 여행 꾸러미

우리 집 tv 장식장 서랍에는 약이며 발톱깎이 등 자질구레한 물건이 담겨 있다. 자질구레하지만 꼭 필요해서, 손이 자주 닿는 곳에 두어야 할 물건들이다. 꼭 필요한 물건 가운데 이 꾸러미가 들어 있었다. 하도 구석 깊숙이 있어서 잘 모르고 있었다. 2018년 3월 말부터 4월 말까지, 생애 첫 유럽 여행을 앞두고 꾸린 물건들이다.


첫 유럽 여행, 그것도 혼자 간다는 생각에 필요한 게 무엇이 있을까 내리 고민했다. 건조하니까 마스크팩, 한 달이면 손톱이 자랄 테니 손톱깎이, 다치고 덧나면 안 되니까 소독약과 온갖 밴드, 혹시 몰라 반짇고리도 챙겼다. 약으로는 감기약과 설사약, 또 이유를 모르겠지만 키미테도 챙겼다. 마지막으로 외국인 친구를 만날 수 있다는 생각에 다이소에서 한국 문양 테이프도 담았다. 한국에서도 잘 쓰지 않는 물건이었다. 결과는, 다 쓰지 않았다. 딱 하나만 빼고. 사진에는 없는 '한국 감기약'이다. 그 말인즉슨, 나의 첫 유럽 여행은 감기와의 전쟁이었다. 생애 감기 때문에 이렇게 아팠나 싶을 정도로 앓아누웠다. 목구멍이 부을 만큼 부어 'fork'도 발음하지 못했을 정도.


첫 도착지인 체코 프라하가 예상보다 너무 추웠던 까닭이다. 한국에서 챙겨간 감기약은 프라하 여행 초반에 다 먹었고, 오스트리아에서 산 감기약-사진 속 파란 약-은 효과를 보지 못했다. 사실 사탕처럼 녹여 먹는 게 맞나 갸웃하며 다 먹지 못했다. 파란 약에 대한 기억이 또 하나 있는데, 열심히 파파고 번역기를 돌려 약을 사서 나오는 길에 웬 남자가 말을 걸었다. "너 노래 좋아해?" 하며 다가오는 그에게 우물쭈물 "아니"라고 대답하고 도망가듯 지나쳐갔다. 위협한 것도 아니었는데 말이다. 나중에 '카더라' 글을 보니 사기꾼일 확률이 높았다는데, 아니길 바란다. 다행히 세 번째 방문국인 슬로베니아에서 다른 감기약을 먹고 나서야 좀 나았다. 아픈 와중에도 약국에서 체중까지 재고 온 나란 사람. 아파도 살이 빠지지 않더라.


여행 꾸러미를 꺼내니 마음이 간질간질, 입도 간질간질하다. 최근 포르투에 다녀온 이야기로 글을 쓰고 싶었는데, 아무래도 진짜 써야겠다.


여행의 추억은 유통기한이 없고, 나의 꾸러미에는 유통기한이 있다. 추억은 손에 잘 닿는 곳에 남기고 유통기한 지난 물건은 잘 보내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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