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꽂이를 정리하다 보니 읽고 비워야지 싶은 책이 수두룩하다. 책을 참 안 읽는데 그나마 읽은 것도 기억이 안 난다. 처음이거나 다시, 읽어야 할 책들을 모아놨다. 정작 비울 게 없어 당황스러웠다. 그러다 운 좋게, 사실 급조한 비움. 고등학교 때 쓴 필사공책.
최근 계획이 생겼다. 필사 공책을 쭉 보관하기로. 그날그날의 필사는 다 이유가 있을 테고, 다른 형식의 일기라고 느꼈다. 이 생각이 들자마자 지난날 버린 필사공책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그리고 결국 다시 꺼냈다. 버리고 며칠 안 지나 취소, 아니 물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두 개 이상 버린 날도 있으니 괜찮다며 스스로 다독였다.
필사공책 비우면서 다른 필사공책 주워 담은 얘기를 하는 이유는, 나름의 기준이 생겼다는 거다. 반 이상 쓴 것, 정성을 들인 것. 눈치챘을지 모르지만 '나름의 기준'은 핑계다. 이 필사공책은 몇 장 쓰지 않았고, 심지어 감성적인 낙서도 없다. 입뺀 없기로 소문난 추억의 방주조차 탑승 거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