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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하루 비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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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씨방 Dec 24. 2020

201224

선풍기였다

오늘의 비움, '뭐'였던 선풍기

내가 너의 이름을 부르기 전에 너는 한낱 사물에 불과했다. 그러니까, 1년 가까이 서랍장 옆 바닥에 멀거니 놓여 있던 이 사물을 들춰본 게 오늘 처음이다. 익숙해서 '뭐'가 그 자리에 있는지도, 심지어 선풍기라는 역할도 잊었다.


서랍장과 벽 이에 공간이 있다. 무심코 서랍장 위에 양말을 올려놨다가 틈에 빠트릴 뻔했고, 실제로도 빠트렸다.  럴 땐 사로 된 옷걸이를 길게 늘어뜨려 빼낸다. 오늘은 레깅스를 찾다 찾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서랍장과 벽 사이로 불빛을 비춰봤다. 뭉특한 게 보였다. 아차. 힘껏 서랍장을 움직였다. 


먼지, 신비아파트 고스트카드, 구슬, 레깅스, 심지어 봉투를 뜯지 않은 새 속옷도 나왔다. 먼지 구덩이를 쓸어담는'그 자리'선풍기가 거슬렸다. 보아하니 한참 안 쓴 거 같았다. 언니에게 비워도 되냐고 묻자 바로 그러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자기 것도 아니라면서.


그러면 누구 것인지 모를 물건이 오랜 시간 한자리에 있었는데, 아무도 의심하지 않았다는 말인가. 우리 참 대단하다, 대단해. 오늘 어두운 구석에서 꺼낸 건 레깅스와 속옷, 그리고 나의 무관심인 것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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