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길에 '사고라도 났으면' 하고 바랐다

주머니탐구생활#09. 플러스펜 자국

by 김씨방

퇴근길에 손을 보면 플러스펜이 묻어 있다.

나는 편집디자인 회사에서 기획자로 일한다. 8년첫 회사에 들어갔다. 그곳을 떠올리면 검붉은 색이 먼저 생각난다. 마감 즈음이면 혼자 사무실에 남는 일이 많았다. 당시 회사 건물에는 붉은색 간판이 붙어 있었는데, 퇴근할 때 그 간판을 보면 어둠에 잠겨 검붉은 색에 가까워 보였다. 아무리 늦은 시간에 퇴근해도 팀원들에게 그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 ‘다 내가 부족해서 그런 거야’ 하고 생각했다. 그건 따뜻한 위로도 자기계발을 위한 자극도 되지 않았다. 자주 닦아도 손에는 플러스펜 자국이 남았다. 그 자국이 보기 싫어 주머니에 손을 숨겼다.


당연한 질문이 내게는 몇 날 며칠의 고민거리였다.

같은 팀에는 띠동갑인 차장님과 팀장님이 있었고, 나는 여느 신입사원이 그렇듯 잘 몰랐다. 학교에서 만난 사람들과는 다른 ‘어른’이었다. 나는 어른이자 상사인 그들에게 어떻게 말 걸어야 할지 알지 못했다. 교정 보는 법을 몰라 포털사이트에 검색했다. 신빙성 없는 글들을 참고해가며 교정을 봤고, 그게 정답이 아닌 걸 알아서 불안함에 밤잠을 설쳤다.


모르는 일을 익히는 것보다 모르는 사람을 알아가는 것이 더 어려웠다.

몇 번 실수를 하다 보니 당연히 사람들의 눈치를 살피기 시작했다. 지레짐작으로 ‘저 사람은 나를 싫어해’라는 생각을 더 많이 했다. 그래서 점심시간이 불편했다. 공감할 수 있는 주제가 거의 없었다. “주말에 뭐 하셨어요?”라는 가벼운 질문도 실례가 될 것 같아 속으로 앓다가 이내 고개를 푹 숙이고 밥만 먹었다.


팀원들과 어울리기 위해 내가 선택한 건 ‘막내로서 으레 해야 할 것만 같았던’ 일들이다. 아침이면 자리마다 놓인 가습기를 청소하고, 부러 상사의 도시락통도 설거지했다. “제가 할게요”라는 말버릇도 그때 생겼다.



사무실에서 나는 점점 말수가 줄었다.

‘나는 안 돼’라며 스스로 보이지 않는 벽을 쌓았다. 한 번은 새벽 4시에 퇴근하는데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걷기 위해 무릎을 굽히는 일이 왜인지 무릎을 꿇는 것처럼 느껴졌다. 한 발 한 발 무너지듯이 걸었다. 택시 안에서 생각했다. ‘콱 사고라도 났으면.’ 이대로 사고가 나면 출근을 안 해도 되겠지. 내 앞에 벌어진 상황들을 나름 정당하게 외면할 수 있겠지. 그리고 ‘푹 잘 수 있겠지’ 싶었다.

그리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여느 날처럼 일찍 출근길 지하철에 올랐다. 사람들은 꾸벅꾸벅 졸거나 휴대전화를 봤다. 누군가 아침에 지하철에서 본 사람들의 얼굴을 그리라고 하면 어떤 특징도 짚어내지 못했을 거다. 그 안에 나도 있었다. 스스로를 ‘모자란 사람’이라고 규정 지으면서 지하철에 실려 가는 나. 지워도 지워도 사라지지 않는 플러스펜 자국처럼 스스로가 내린 그 규정이 나를 더 힘들게 만들었다.


퇴근길에 하던 기대와 달리 나는 아무런 사고도 없이 그곳에서 1년을 지냈다. 그리고 나는 다른 편집디자인 회사에 들어갔다.


지금의 나는 그때와 다르다.
여전히 손에는 플러스펜이 잘 묻는다. 달라진 게 있다면 “주말에 뭐하셨어요?”라는 말과 농담을 잘 건네며, 일할 때 “이건 그래서 그런 거예요”라는 근거를 댄다. 그렇다고 능숙해진 것은 아니다. 단지 가벼운 질문을 하거나 작은 고집을 부리는 것이 생각보다 대단한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됐다. 나이를 먹으면서 자연스럽게 체득한 것 중 하나다. 당연히 해도 되는 말, 그러니까 나를 위한 발언권을 갖는 중이다.


그러나 지금도 가끔 ‘사고가 났으면’ 하고 바란다.

일과 사람을 알아가는 일은 여전히 어렵다. 같은 기획안을 몇 번씩 수정하거나 새벽까지 일하고 다음날 일찍 출근해야 할 때면 ‘내일이 오지 않았으면’ 하는 생각을 한다. 다 집어던지고 싶은데 그럴 만한 용기가 없을 때 스스로를 궁지로 몰아넣는다.

플러스펜 자국을 깨끗하게 지울 수 없다면, 잠시 잊어버릴 수 있는 요령이 필요하다.


가끔 찾아드는 이 생각을 차라리 감기에 걸린 거라고 여긴다.

그리고 감기약을 먹는 대신 빨리 나을 수 있는 주문을 외운다.


아등바등 할 필요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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