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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씨방 Jan 17. 2019

퇴근길에 '사고라도 났으면' 하고 바랐다

주머니탐구생활#09. 플러스펜 자국

퇴근길에 손을 보면 플러스펜이 묻어 있다.

나는 편집디자인 회사에서 기획자로 일한다. 8년 전 첫 회사에 들어갔다. 그곳을 떠올리면 검붉은 색이 먼저 생각난다. 마감 즈음이면 혼자 사무실에 남는 일이 많았다. 당시 회사 건물에는 붉은색 간판이 붙어 있었는데, 퇴근할 때 그 간판을 보면 어둠에 잠겨 검붉은 색에 가까워 보였다. 아무리 늦은 시간에 퇴근해도 팀원들에게 그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 ‘다 내가 부족해서 그런 거야’ 하고 생각했다. 그건 따뜻한 위로도 자기계발을 위한 자극도 되지 않았다. 자주 닦아도 손에는 플러스펜 자국이 남았다. 그 자국이 보기 싫어 주머니에 손을 숨겼다.    


당연한 질문이 내게는 몇 날 며칠의 고민거리였다.

같은 팀에는 띠동갑인 차장님과 팀장님이 있었고, 나는 여느 신입사원이 그렇듯 잘 몰랐다. 학교에서 만난 사람들과는 다른 ‘어른’이었다. 나는 어른이자 상사인 그들에게 어떻게 말 걸어야 할지 알지 못했다. 교정 보는 법을 몰라 포털사이트에 검색했다. 신빙성 없는 글들을 참고해가며 교정을 봤고, 그게 정답이 아닌 걸 알아서 불안함에 밤잠을 설쳤다.    


모르는 일을 익히는 것보다 모르는 사람을 알아가는 것이 더 어려웠다. 

몇 번 실수를 하다 보니 당연히 사람들의 눈치를 살피기 시작했다. 지레짐작으로 ‘저 사람은 나를 싫어해’라는 생각을 더 많이 했다. 그래서 점심시간이 불편했다. 공감할 수 있는 주제가 거의 없었다. “주말에 뭐 하셨어요?”라는 가벼운 질문도 실례가 될 것 같아 속으로 앓다가 이내 고개를 푹 숙이고 밥만 먹었다.    


팀원들과 어울리기 위해 내가 선택한 건 ‘막내로서 으레 해야 할 것만 같았던’ 일들다. 아침이면 자리마다 놓인 가습기를 청소하고, 부러 상사의 도시락통도 설거지했다. “제가 할게요”라는 말버릇도 그때 생겼다.    



사무실에서 나는 점점 말수가 줄었다. 

‘나는 안 돼’라며 스스로 보이지 않는 벽을 쌓았다. 한 번은 새벽 4시에 퇴근하는데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걷기 위해 무릎을 굽히는 일이 왜인지 무릎을 꿇는 것처럼 느껴졌다. 한 발 한 발 무너지듯이 걸었다. 택시 안에서 생각했다. ‘콱 사고라도 났으면.’ 이대로 사고가 나면 출근을 안 해도 되겠지. 내 앞에 벌어진 상황들을 나름 정당하게 외면할 수 있겠지. 그리고 ‘푹 잘 수 있겠지’ 싶었다.    

 

그리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여느 날처럼 일찍 출근길 지하철에 올랐다. 사람들은 꾸벅꾸벅 졸거나 휴대전화를 봤다. 누군가 아침에 지하철에서 본 사람들의 얼굴을 그리라고 하면 어떤 특징도 짚어내지 못했을 거다. 그 안에 나도 있었다. 스스로를 ‘모자란 사람’이라고 규정 지으면서 지하철에 실려 가는 나. 지워도 지워도 사라지지 않는 플러스펜 자국처럼 스스로가 내린 그 규정이 나를 더 힘들게 만들었다.    


퇴근길에 하던 기대와 달리 나는 아무런 사고도 없이 그곳에서 1년을 지냈다. 그리고 나는 다른 편집디자인 회사에 들어갔다.    


지금의 나는 그때와 다르.
여전히 손에는 플러스펜이 잘 묻는다. 달라진 게 있다면  “주말에 뭐하셨어요?”라는 말과 농담을 잘 건네며, 일할 때 “이건 그래서 그런 거예요”라는 근거를 댄다. 그렇다고 능숙해진 것은 아니다. 단지 가벼운 질문을 하거나 작은 고집을 부리는 것이 생각보다 대단한 일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됐다. 나이를 먹으면서 자연스럽게 체득한 것 중 하나다. 당연히 해도 되는 말, 그러니까 나를 위한 발언권을 갖는 중이다.    


그러나 지금도 가끔 ‘사고가 났으면’ 하고 바란다.

일과 사람을 알아가는 일은 여전히 어렵다. 같은 기획안을 몇 번씩 수정하거나 새벽까지 일하고 다음날 일찍 출근해야 할 때면 ‘내일이 오지 않았으면’ 하는 생각을 한다. 다 집어던지고 싶은데 그럴 만한 용기가 없을 때 스스로를 궁지로 몰아넣는다.

플러스펜 자국을 깨끗하게 지울 수 없다면, 잠시 잊어버릴 수 있는 요령이 필요하다.


가끔 찾아드는 이 생각을 차라리 감기에 걸린 거라고 여긴다.

그리고 감기약을 먹는 대신 빨리 나을 수 있는 주문을 외운다.    


아등바등 할 필요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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