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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씨방 Jan 24. 2019

어쨌든 저녁이 있는 삶

주머니탐구생활#10. 알람

주머니에 넣어둔 휴대전화 알람이 울린다.

8시다. 사진을 찍어 인스타그램에 업로드한다. #저녁이있는삶. 매일 저녁 8시의 일상을 기록하고 있다. 세 달 동안 80개 게시글을 올렸고 팔로워는 10명이다. 여느 일처럼 호기롭게 시작했지만 지금은 몸이 아프다거나 휴대전화가 꺼졌다는 등의 이유를 핑계 삼아 거르는 일도 있다. 보는 사람도 하는 사람도 재미없는 이 행동은 작은 반발심에서 시작됐다.    


‘내 저녁 시간을 보장하라!’

나는 습관적 ‘야근러’다. 입사 초기에는 신입의 열정을 보여주기 위해, 이후에는 같이 저녁을 먹거나 눈치를 보느라 야근을 했다. 대체로 팀워크를 위한 일이었다. 내 시간을 할애해도 결국 나에게 남는 게 없다는 걸 깨달았을 땐, 이미 습관적 야근러가 돼 있었다. 퇴근 후엔 한 시간이라도 ‘내 시간’을 가지려고 술을 마시거나 눈이 감길 때까지 휴대전화를 만졌다.     


늦게 퇴근하고, 늦게 자고, 아슬아슬하게 출근했다. 생활도 무기력해졌다. 평일에 친구를 만나거나 드라마 본방송을 챙겨 보는 일에 대해 ‘해야지’보다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더 많이 했다. 습관적으로 야근을 할 뿐 아니라 습관적으로 내 즐거움도 단념하고 있었다.    


그래서 나와 협상을 했다.

즐거움을 단념하는 대신 다른 즐거움을 선물해주기로 했다. 하나는 기다리는 즐거움이다. 매일 8시 알람에 맞춰 사진 찍는 이벤트를 열었다. 다른 하나는 훔쳐보는 즐거움이다. 사진들로 하여금  잊어버릴 뻔한 장면들을 훔쳐와 본다.      

 


협상의 효과가 있는지 물어본다면, 사실 크지는 않다.

8시를 손꼽아 기다리거나 8시가 되기 전 퇴근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열 일을 하지도 않는다. 무엇보다 내 일상을 왜곡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한몫했다. 보정과 연출 없이 사진을 찍다 보니 얼핏 괴기스러운 사진도 몇 있다. 특정 시기에는  사무실과 야근 중 찾은 식당 사진이 대부분이라 어디 자랑하기도 애매하다. 우울해지지나 않으면 다행일 테고.    


그러나 효과가 없지는 않다. 

사진이 쌓이면서 그날그날의 감정을 되새길 수 있는 일기장이 됐다. 그리고 8시면 잠시 손을 놓을 수 있다. 별 소득 없이 해오는 자책이나 생각을 잠시 내려놓고 당장 눈앞에 있는 것을 보게 만들준다. ‘아 맞다’ 하면서 당장 발 딛고 선 곳을 보게 해 준다고나 할까. 내가 사무실에 있든 집에 있든 8시는 온다. 어쨌든 저녁은 있는 삶이라는 거다.    


순전히 나만을 위한 인스타그램에는 예쁜 사진 좋은 글귀도 없다. 정보성은 더더욱 아니다.

그럼에도 저녁 8시마다 소소한 질문을 던진다.    


오늘 8시, 무엇을 하고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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