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머니탐구생활#12. 구슬
주머니에 구슬이 들어 있었다.
조카와 구슬 찾기 놀이를 하다가 넣어둔 것이다. 한두 사람이 집 안 구석구석 구슬을 숨기면 다른 한 사람이 구슬을 찾아내는 놀이다. 나는 조카와 놀 때 내가 어릴 적 하던 놀이를 떠올리며 하는 편이다. 어릴 적에는 뭐든 숨기는 걸 좋아했다. 구슬이든 비밀 이야기든. 무언가를 숨기며 우리는 돈독해졌다. 반대로 돈독해지려고 숨겨 놓은 것도 있다.
어릴 적 친구들은 내 편과 네 편으로 나뉘었다.
초등학교에 입학해서는 줄곧 여자친구와 어울렸다. 이성 친구와 친하게 지내면 꼭 좋아한다고 오해받았다. 자연스럽게 여자와 남자로 편을 갈랐다. 아이들은 자신이 속한 그룹에서 존재감을 드러내려고 부러 다른 편을 깎아내리기도 했다.
내가 속한 그룹에는 여자 편과 남자 편 외에도, 내 편과 네 편이 있었다. 내 편은 모든 일에 함께해준다. 화장실 같은 칸에 들어가 친구가 볼일을 마칠 때까지 기다린다. 또 자물쇠가 달린 일기장에 심심하다든지 떡볶이가 먹고 싶다는 말들을 적어 교환한다. 네 편은 이러한 일거수일투족을 다른 친구와 한다. ‘세 명의 법칙’에 의해서도 만들어진다. 세 명이 있으면 그중 한 명은 소외당한다. 야외학습을 할 때는 항상 두 명이 짝지어 이동했고, 버스 좌석도 두 개밖에 없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질투심이 많았다.
우리는 질투심이 많았다.
친구 A와 비밀 만들기를 좋아했다. 그때 처음 자물쇠가 달린 일기장을 교환하고 장래희망도 정했다. 비밀이 많아질수록 A와의 관계도 특별해졌다. 그리고 B를 알게 됐다. 착하고 잘 웃는 아이였다. A는 우리 아지트에 B를 데려오고, 비밀 이야기에도 B를 참여시켰다. 비밀 이야기가 전처럼 특별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셋이 노는 게 불편하다고 말하면 A와 멀어질까 부러 B에게 친절하게 대했다. 시간이 지나 나는 B와 가까워졌다. 그리고 A의 말수가 줄었다.
A는 나와 단둘이 있을 때면 B의 이야기를 했다. 물건을 살 때 오래 고민하는 게 답답하다든지 하교할 때 책가방을 늦게 꾸리는 게 거슬린다는 내용이었다. 몇 날 며칠을 뭉근하게 이야기했던 것 같다. 어린 나이였지만 A가 원하는 대답이 뭔지, 그리고 내가 고개를 끄덕였을 때 어떤 일들이 일어날지 짐작할 수 있었다. A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다. 사실은 오랜만에 A와 비밀을 만들었다는 생각에 설렜다.
얼마 뒤 화장실 벽에 B의 험담이 적혔다. B가 울었고 우리는 B를 위로했다. 나는 험담을 적은 게 A라는 사실을 알았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사실은 하지 않았다.
무서웠다. B의 친언니라도 나타나 우리를 혼낼 것 같았다. 사실은 A가 더 무서웠다. 이제 와서 내가 싫다고 말하면, 반대로 A와 B가 나를 괴롭힐 것 같았다. 나는 싫다는 말 대신 앞으로 우리 둘만 화장실에 가자고 제안했다.
하루하루 B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처음 화장실 벽에 낙서하는 것으로 시작했던 일이 나중에는 B의 별명을 만들어 면전에 험담을 늘어놓는 일로 번졌다. 나는 A와 비밀스러운 말들을 주고받지만, 그게 B를 괴롭히는 일이라는 걸 몰랐다. 아니 그렇게 보이고 싶었다. 나는 B와 헤어지기 전에 일부러 소리 높여 인사했고, B와 단둘이 있을 때면 더 환하게 웃었다.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이.
새 학년이 돼 우리는 다른 친구들을 사귀었다.
새로운 곳에서 내 편을 만들기 위해 나는 더 크고 많은 비밀을 만들었다. A와 나눈 비밀은 금방 작고 오래된 이야기가 됐다. 내가 네 편으로 내몰린 적도 있다. 아이들은 내가 모르는 이야기에 웃었고 쉬는 시간에는 내게 말도 없이 반을 나섰다. 나는 쉬는 시간 10분 동안 멀거니 자리에 앉아 있는 게 싫어 피곤한 척 엎드렸다. 엎드려서 눈만 꿈뻑거리다가 B는 어떤 기분이었을지를 생각했다. 알 수 없었다. 나는 그때 B의 얼굴을 제대로 쳐다보지 않았다.
당시 A와 나눈 비밀, 다른 아이들과 나눈 비밀 이야기가 잘 기억나지 않는다.
기억나는 건 꼭 한 사람은 쉬는 시간에 혼자 남겨졌다는 사실이다. 비밀이 많을수록 견고해질 줄 알았던 우리 관계는 사실 비밀스럽지 않았다. 그래서 쉽게 뭉치고 흩어졌다. 어쩌면 제대로 설명하거나 마주보고 싶지 않은 일들에 '비밀'이라고 이름 붙였는지도 모른다.
당시 나는 B의 얼굴을 제대로 쳐다보지 못했지만 내 얼굴은 기억한다.
궁금했다.
뭘 잘못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