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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씨방 Mar 05. 2019

다른 사람의 안부가 궁금해지는 날

주머니탐구생활#15. 책

중고서점 한편에 공책이 놓여 있었다.

책 구절을 필사할 수 있게 마련한 것이다. 앞사람이 한 단락을 필사하면 뒷사람이 다음 단락을 이어 적었다. 공책을 거꾸로 넘겼다. 한 글자 한 글자 꾹 눌러쓴 사람, 유독 마지막 문장을 크게 쓴 사람, 첫 문장부터 마지막 문장까지 삐뚤빼뚤한 사람. 한 사람의 목소리로 쓰인 책에서 여러 사람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야기해주는 것 같았다. 나도 다음 단락을 이어 적고 책을 사서 나왔다.     


내 입장만 생각하기도 벅찰 때가 많다.

50분에 오는 지하철을 놓치면 회사에 지각한다. 집에서 일찍 나서자고 다짐한 지 이틀 만에 늦잠을 잤다. 그날은 오전부터 회의가 잡혔다. 휴대전화로 이야깃거리를 검색했다. 검색하고, 뛰고, 다시 검색했다. 간신히 지하철역에 도착했다. 앞사람이 개찰구 앞에서 머리끈을 떨어트렸다. 불러 세우려다가 ‘머리끈쯤이야’ 하고 말았다. 그 사람과 같은 지하철에 탔다. 그 사람은 한 손으로 머리카락을 쥐고 다른 한 손으로 주머니를 뒤적였다.  

   

그런 날이 있다. 눈앞에 할 일이 산더미 같이 쌓여서 더 하고 싶지 않은 날. 산더미 앞에서 내가 한없이 작아지는 날. 그런 날에는 꼭 내 앞에서 무언가 흘리거나 도움을 청하는 사람이 나타난다. 나는 그날 엘리베이터에 타자마자 닫힘 버튼을 눌렀다. 맞은편 유리로 누군가 건물에 들어서는 게 비쳐 보였다. 한 번 더 닫힘 버튼을 눌렀다.     


눈앞의 일을 해치우면 또 다른 일이 온다.

회사 책상에는 칸막이가 없다. 동료들은 열린 공간으로 “이것 좀” 하고 말을 걸어온다. 책상에 서류가 쌓이고 나는 서류를 칸막이 삼아 작게 숨을 고른다. 회사를 나섰는데도 제대로 숨 쉬기가 어렵다.     


눈앞의 사람이 눈앞의 일처럼 느껴진다. 집에 가려면 지하철에서 40분을 버텨야 한다. 지하철 문이 열리면 사람들이 들어서고, 나는 원래 서 있던 곳에서 몇 걸음 물러선다. 덥고 답답한 그곳에서 사람들 어깨를 칸막이 삼아 작게 숨을 고른다. 모두 휴대전화를 보거나 눈을 감고 있다. 사람들이 가득한데 문득 외롭다.


그럴 땐 궁금하다.

오늘이 무슨 요일이었더라. 누구는 머리카락이 길고 또 누구는 쌍꺼풀이 짙다. 생김새와 사는 곳이 다 다른데 왜 지하철 풍경은 어제와 비슷할까. 잘 모르는 사람의 안부가 궁금하다. 맞은편 사람은 오늘 어떤 하루를 보냈을지, 어떤 목소리를 가지고 있을지를 생각한다. 개찰구를 나서는데 아침에 머리끈을 잃어버렸던 사람이 생각난다.

    

내 일만으로도 벅차서 나만 생각한다. 잡담하는 대신 이어폰을 끼고 혼자 점심을 먹으러 나간다. 그런데 나아진 게 없다. 여전히 숨 고를 만한 곳이 필요하다. 사람들은 어디에서 숨을 고르는지 궁금하다. 책의 같은 구절을 다른 목소리로 옮겨 적는 것처, 각기 다른 모양의 칸막이를 가지고 있을는지. 막연하게 모르는 사람의 목소리와  칸막이를 떠올리면서 바란다.


누군가도 내 안부를 물어봐 줬으면 하고 바란다.

집에 돌아와 중고서점에서 산 책을 펼쳤다. 몇 장 읽다가 뒤집어 놨는데 커버가 벗겨졌다. 커버 안쪽에 ‘2011년 따뜻한 봄’이라고 적혀 있다. 평소 같았으면 바로 커버를 씌었을 텐데, 한참 글자를 봤다. 그리고 이어 적었다.    



2019년에도 따뜻한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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