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머니탐구생활#16. 단골가게
가끔 예전에 살던 동네를 지나간다.
근처에 자주 찾는 가게가 있다. 가게 앞의 굴다리만 건너면 옛 동네가 나온다. 종종 술에서 깰 겸 그 길을 걷는다. 재개발을 앞두고 주민 대부분이 이사를 했다. 사람들은 떠났지만 그들이 자주 갔던 가게는 몇 남아 있다. 그중 하나가 국수집이다. 삼천 원짜리 국수를 파는데, 주문하는 즉시 면발을 뽑고 고명으로 김가루와 계란 지단을을 얹어준다. 해장을 하거나 허기를 달래려고 자주 갔다. 특히 옛 애인이 좋아했다. 우리 동네의 명물이라고 했다.
우리 동네에는 명물이라고 할 만한 게 없었다.
좁은 시장 골목과 가게 그리고 한자리에서 오래 장사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동네를 한 바퀴만 돌아도 익숙한 얼굴을 봤다. 내가 초등학생 때 학교 앞에서 아이스크림을 팔던 아줌마는 몇 년 뒤 떡볶이 장사를 했고, 대학에 다닐 때는 어느새 허리 구부정한 할머니가 돼 폐지를 주우러 다녔다. 우리는 인사하는 대신 지나쳤다. 아마 ‘아직 여기 있구나’ 하고 같은 생각을 했을 것 같다. 30년 가까이 한 동네 같은 집에서 살았다. 어디에서 뭘 파는지, 그곳 자녀가 내 동창인지도 알았다. 말 그대로 거기서 거기. 그래서인지 새로운 장소에 가도 호기심이 생기지 않았다. 다 거기서 거기라는 생각에.
그런데 애인과 우리 동네를 걸으면 꼭 새로운 곳을 발견했다.
애인은 “이런 데 포장마차가 있네”라고 말했다. 웬 포장마차가 있었다. 익숙한 나머지 도로변 나무를 대하듯 그냥 지나쳤던 곳이다. 우리는 그곳에서 곱창을 먹었고, 이후 이주일에 한 번씩은 들렀다. 초등학생 때 이후로 가지 않았던 24시간 우동집도 다시 찾았다. 애인은 자기가 프렌차이즈를 내야겠다면서 한 그릇을 비웠다.
애인과 다니면서 나는 ‘우리 동네도 조금씩 변한다’는 걸 느꼈다. 같은 가게지만 어떤 날은 전구가 세 개밖에 안 들어왔고 또 어떤 날은 음식이 짰다. 그런 날들이 꼭 불편하지는 않았다.
실제로 동네는 조금씩 변하고 있었다.
재개발 때문에 이사 가는 집이 부쩍 늘었다. 우리 집은 골목 어귀에 있었는데, 그곳으로 작은 쓰레기 더미며 큰 가구가 쌓였다. 우리 집도 이사를 했다. 태어나 처음으로 맞는 이사였다. 애인은 내게 기분이 어떻냐고 물었다. 별다른 생각이 없었다. 이사하는 데 품을 들이지도, 시간을 들여 내 짐을 꼼꼼이 싸지도 않았다. 애인은 그래도 정든 동네를 떠나는 것이니 슬프지 않냐고 다시 물었다. 그날이 돼봐야 알 것 같았다.
이삿날, 이삿짐 센터 직원들이 신발을 신고 우리 집에 들어왔다. 큰 가구며 우리 식구가 미리 싸놓은 박스들을 트럭으로 날랐다. 잃어버린 줄 알았던 팔찌가 발에 채여 바닥에 굴러다녔다. 붙박이장 모양으로 색이 바랜 벽지가 드러났다. 나는 빈방에 잠시 머물렀다. 정든 곳을 떠나면 얼마나 슬플지 궁금했다. 다시 한번 팔찌를 보고, 곰팡이가 핀 벽을 보다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하지만 울지 못했다.
정든 곳을 떠나도 눈물이 안 났다는 내 말에 애인은 이렇게 대꾸했다. “아직은 다시 갈 수 있으니까.”
나는 새로 이사한 동네에 금방 적응했다. 애인과 옛 동네에서 새롭게 만난 가게들을 떠올리며 골목 구석구석을 다녔다. 새로 이사한 동네에는 편의점이 열 군데가 넘고, 술집은 그 배가 넘는다. 어디든 들어가 시간을 보내기 좋았다. 예전 같았으면 도로변 나무처럼 지나쳤을 작은 가게를 들여다봤고, 흥미로운 가게를 발견하면 괜히 “사장님” 하며 너스레를 떨기도 했다. 나도 조금 변해 있었다.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동안 또 한 가지가 변했다. 혼자가 됐다.
애인과 헤어졌다.
서로가 너무 익숙한 나머지 더 이상 새로울 게 없었고, 반대로 너무 익숙해져 버려서 새로운 시도를 하지 못했다. 지금도 가끔 그런 생각을 한다. 오래된 가구를 들어내면 색 바랜 벽지가 드러나는 것처럼, 오래된 사람을 들어내면 색 바랜 무언가를 가지고 있겠구나. 이따금 애인과 함께했던 행동이 휑하니 드러나는 것이다.
이제 예전에 살던 집에 가지 못한다.
매일 다니던 골목에는 쓰레기더미가 가득 찼고, 집 외벽에는 붉은색 스프레이로 ‘철거 예정’이라고 적혔다. 노란 스티커도 붙었는데, 불법 침입 시 처벌을 당한다는 내용이었다. 이사한 지 한 달쯤 지났을 때의 일이다. 이후로도 몇 번인가 찾아갔는데, 갈수록 쓰레기더미가 가득 차 먼발치에서 지켜봐야 했다. 그래도 새집으로 돌아가는 길에는 국수집이 있었다. 그곳만은 여전히 간판을 켜고 제자리에 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불 꺼진 다른 가게를 발견했다. 간판은 그대로인데 가게 안은 비어 있었다. 그곳 의자가 요즘 보기 드문 옥색이라며 애인에게 말했던 기억이 났다. 어찌 됐든 동네는 조금씩 변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도 변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