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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씨방 Nov 12. 2019

너밖에 없어

주머니탐구생활#19.천오백 원

나란히 걷다가도 좁은 길이 나오면 한 걸음 물러났다.

엉거주춤 어깨를 틀면 전봇대에 옷이 쓸렸다. 쉽게 더러워졌다. 놀이터 모래에 떨어트린 물건을 찾아준다든지, 누군가 빌려 간 물건을 대신 받아온다든지 하면 반 친구들도 꾸준히 내 책상으로 찾아왔다. 친구들은 내게 “너밖에 없어”라고 말했다.

눈에 띄게 이쁘거나 말주변이 좋지 않아도 누군가에게 좋은 사람이 될 수 있었다. 친구들의 부탁이 꼭 어려운 일이 아니었는데 말이다. 어려운 줄 몰랐다. “너밖에 없다”는 말을 들으면 마치 내가 보호자가 된 것만 같았다. 애정을 주는 사람과 마땅히 받아야 할 사람. 친구들의 부탁을 해내는 만큼 관계는 돈독해졌다. 양손에 잔뜩 먼지가 묻어도 아무렇지 않다는 듯 털어버렸다. “나 없었으면 어쩔 뻔했냐” 하고 말하면서.

방과 후 두어 시간이 지났을까, 집으로 친구들이 찾아왔다.
갑자기 내 생각이 났다고 했다. 한 친구는 내 팔짱을 끼며 배가 고프다고 했고, 다른 친구는 떡볶이가 먹고 싶다고 했다. 그중 한 친구에게 우리 집을 알려준 적 있는데, 직접 찾아온 건 처음이었다. 나는 비상금 서랍을 열었다. 주머니에 육천오백 원을 넣었다.

떡볶이집으로 가려면 짧은 골목을 지나야 했다. 셋이 팔짱을 끼고 골목을 걷는데 깻잎 머리를 한 중학생 언니들이 다가왔다. 우리에게 돈이 있냐고 물었다. 대답 대신 애꿎은 주머니만 만졌다. 그런데 팔이 허전했다. 


친구들은 팔짱을 풀고 한 걸음 물러나 있었다. 한 언니가 내 앞으로 다가와 '내가 너보다 힘이 세다'며 으름장을 놨다. 나는 주머니에 들어 있던 오천 원을 꺼내 줬다. 언니들이 떠난 후에 친구들은 나를 쳐다봤다.

“우리 이제 어떡해”라는 말에, 나는 천오백 원이 남았다고 대꾸했다. 
떡볶이 한 접시를 다 비우고 나서도, 돌아와 이불을 덮고 누워서도 허전한 느낌이 들었다. 팔을 만지작거렸다. 떡볶이를 배불리 먹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친구들이 다시 우리 집에 놀러 오지 않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내가 오천 원을 줘서 친구들과 무사히 골목을 빠져나온 거라고도 생각했다. 


뒤척이다가 눈을 꾹 감았다. 

정말 나 없었으면 어쩔 뻔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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