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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씨방 Nov 11. 2020

201111

비워서 남도 못 준, 하드커버 공책


오늘의 비움, 비우지 못해 비워진 분홍색 하드커버 공책

최근 지인의 집에 놀러 갔다가 두툼한 책 한 권을 봤다. 드로잉북이었다. “찍는 대신 그렸어”라는 말에 펼쳐본 그 책에는, 2박 3일간의 일본 여행기가 담겨 있었다. 사슴공원에서 본 사나운 사슴, 다음날 같은 공원에서 본 하트 모양 엉덩이의 사슴, 일본 사찰의 지붕, 숙소에서 이불을 둘둘 말아 한 몸이 된 친구들, 이른 아침 그를 깨운 친구의 장난스러운 손길. 눈 감았다 뜨면 금방 지나갈 시간인데 어떻게 매 순간 담아낼 수 있었을까. 한 장 한 장 소중하고 따뜻했다. 나도 그런 책 한 권 만들고 싶었다.

느낌은 다르지만, 나에게도 그런 책이 있다. 고등학교 때 다이소에서 산 하드 커버 공책인데 이곳에 잘 쓴 글을 한가득 채우고 싶었다. 하드커버라니, 비장하지 않은가. 분홍색에 하트가 송송 그려진 건 부끄럽지만. 이곳에 완성된 글만 옮겨 적으려고 따로 연습장을 만들었고, 옮겨 적을 때는 힘주어 글씨를 썼다. 하지만 세 장만 쓰고 책장 깊숙이 밀어 넣었다.

‘두고두고 보고 싶은 물건을 만들고 싶다.’ 가치가 매겨지는 건 그 순간이 아니라, 몇 걸음 지나왔을 때다. 처음부터 다 하고 또 잘하려다 제풀에 꺾여 주저앉는 일이 많다. 지인의 드로잉북을 보고 내가 “대단하다”고 하자, 그는 이렇게 답했다. “되게 편하고 좋았어.” 지인은 되게 편하고 좋아서 그 한 권을 채웠고, 되게 편하고 좋고 싶을 때마다 펼쳐 본다. 나도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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