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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씨방 Nov 12. 2020

201112

애늙은이의 일기장

 


오늘의 비움, 사춘기 서른이 바라본 애늙은이 일기장

고르고, 넘겨보고, 읽어본다. 버리려면 어쨌든 한 번은 마주해야 한다. 대학 시절, 학교에서 공책을 나눠줬다. 붉은색에 널따란 직사각형 모양이고 표지에는 학교 로고를 에폭시로 넣었다. 꽤 예쁘다. 두 권이나 챙겼지만 한 권은 줘버렸고, 나머지 한 권은 오늘 비운다. 2009년의 일기가 두 편 실려 있다. 

일기를 다시 읽는 것만큼 부끄러운 일도 없다. 전혀 다른 사람이 담겨 있다. 한 문장 한 문장 감정적인데다가, 누가 훔쳐볼까 싶어 자세히 쓰지도 않았다. 십 년 전의 나는 뭘 먹고, 뭘 보고 살았을까 궁금하다. 십 년 동안 내가 무엇을 해왔길래 이렇게 달라졌나 궁금하다. 담백한 사람이 된 거라 생각하다가도 현재의 내가 정답은 아닌 것 같다.     


09.12.08. 화
오해란 무엇인가. (...) 나는 입이 가벼운 것에 대해 후회한다. 그 말이 퍼진 것을 안다. 그 말을 한 순간, 나는 3년의 믿음을 져버린 꼴이고 그만큼 그들에게 비칠 것이다. 조심하자. 입은 닫혀 있는 것이 아니었다. (...)     


홧김에 뭔가를 고백했나 보다. 나는 말하고 후회하고, 다시 말하고 후회하는 일을 반복했다.      


09.12.09. 수
(...) 오후가 되면 우리는 거실에서 엉긴다. 고구마를 삶고, 어제 사온 고깃덩이를 자른다. 미란다가 관계 대용으로 초콜릿 케이크를 택한 것처럼, 나는 거실에 기생한다. 내 공간이 허물어진다. (...) 나는 늘 재방송이 아닌가. 아름다워지고 싶다.     


섹스 앤 더 시티의 에피소드 한 편에서, 미란다는 관계 대신 초콜릿 케이크를 택한다. 초콜릿 케이크에 의존할수록 일상도 무너지고 만다. 무언가를 잊기 위해 다른 무언가를 택하는데, 결과도 크게 다르지 않다. 미란다가 느꼈을 무기력함을 짐작해보곤 했다. 비단 2009년뿐 아니라, 나는 ‘내 공간이 없다’ ‘생산적이지 않다’는 이야기를 많이 한다. 나는 스스로에 대한 실망감을 잊으려고 뭘 먹었다. 많이도 먹었다. 하기 싫은 일이 있어도, 보고 싶지 않은 사람이 생겨도. 음식을 씹어 삼키는 것만큼 단순한 것도 없지 싶었다.


뭐, 그래도 이때는 요리라도 조금 했나 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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