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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씨방 Nov 16. 2020

201116

약 없는 약상자


오늘의 비움, 속지 말자 약 없는 구급상자

덮어 놓고 모으는 데는 약도 없다. '일단 담고 덮는다.' 자질구레한 물건들을 어디 담을까 고민하다 마침 이 상자가 눈에 들어왔고, 나는 이 상자를 방 한구석에 들여놨다. 수납 공간이 생각보다 넓은 데다가 불투명해서 은밀한 물건을 넣어두기에도 제격이었다. 들키고 싶지 않은, 들키면 안 되는 물건들은 한 번씩 이 상자를 다녀간 이력이 있다.


상자 위 상자-짐-들


싹 비워야지, 비워야지 하다가 겨우 열었다. 상자는 주인 모를 유아 퍼즐 두 박스와 화장품 박스, 그리고 여행 가서 언니 주려고 산 인형에 짓눌려 있었다. 조심스레 발굴해 상자를 열었다.



약 십 년 전 남자 친구에게 쓰다 만 편지, 2013년 아빠의 월급봉투 한 장, 같은 해 내 대학 등록금 영수증과 동기 두 명이 함께 써준 생일 축하 편지, 교수님이 종강 때 써주신 편지, 2014년 은행 두 곳의 모바일뱅캉 전자금융 신청 확인서와 통장, 2014년 전전전 휴대전화 구매 계약서와 간단 사용 설명서, 2016년 다른 은행 한 곳의 전자금융 신청 확인서와 통장, 2017년 겨울 건강검진 진단서, 2019년 세부공항에서 휴대전화 떨어뜨리고 급하게 새로 산 휴대전화 구매 계약서, 또 라이터 세 개와 폴라로이드 흑백사진, 잉크 굳은 라미 만년필, 안경닦이 수건과 폴라로이드 사진 전시용 끈


뭐, 나름 의미 있는 것들의 집합체다. 월급봉투나 등록금 영수증은 내게 주어지는 것을 너무 쉽게 생각하지 말자는 의미에서 담았고, 전자금융 신청확인서는 내가 아날로그 인간이라 아이디를 잊어버릴까 봐, 진단서는 건강 상태를 잘 알자고-2019년 자는 버렸다-, 휴대전화 구매 계약서는 호구 짓 당하지 말자고 넣어 둔 것이다. 차마 못 버리겠어서, 언젠가 다시 꺼낼까 봐, 또 숨기고 싶어서 밀어 넣는 것도 있다.


상자라는 건 참 이상하다. 크기와 형태에 상관없이, 또 물질적인 상자든 내면적인 상자든 상관없이 무조건 밀어 넣게 되니 말이다. 상자만 버리고 나머지는 차곡차곡 정리해두려고 했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언짢다. 모두 차곡차곡 정리해둔다면, 그건 다시 밀어 넣는 거랑 마찬가지 아니겠어. 몇 개라도 더 비운다.


잘 펼쳐보지 않을 것들.


약 십 년 전 쓰다 만 편지, 2013년 동기가 써준 생일 축하 편지, 2014년 은행 두 곳의 모바일뱅캉 전자금융 신청 확인서, 2014년 전전전 휴대전화 구매 계약서와 간단 사용 설명서, 2016년 다른 은행 한 곳의 전자금융 신청 확인서, 2017년 겨울 건강검진 진단서를 함께 비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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