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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씨방 Nov 17. 2020

201117

문식과 상우와 리안 주머니에서 나온 시, 출력물


오늘의 비움, 문식과 상우와 리안의 시 출력물

나는 리안이다. 누군가 내게 "두리안 같아"라고 말하자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후로 나는 두리안이 됐다. 어떤 일은 분명한 이유를 찾는 것보다 하루빨리 받아들이는 게 마음 편하다. 그리고 내 곁엔 문식과 변상우가 있다. 우리 셋은 '뜰아이들'이다. 대학 때 같은 수업을 들었다는 아주아주 단순한 이유와 우연으로 시작한 모임이 8년 동안 이어져오고 있다. 짧지 않은 시간이라, 우리는 의도치 않게 서로의 나이 들어가는 모습을 지켜본다. 연애와 이별과 결혼, 그리고 취업과 진학과 병 등 몰라도 될 것까지. 말이 이렇지, 그렇-게 막연하진 않다.


처음엔 시 쓰는 스터디로 만났는데, 돌아보니 술 마시는 술터디로 변해 있더라. 계속 안 쓰고 살 수 있는데 문득 '잘 살고 있나' 싶은 의문이 들었다. 새로운 취미를 가져도 좋았을 거다. 하지만 추억과 미련은 힘이 세다. 우리는 요즘 한 두 달에 한 편씩 시를 가지고 만난다. 시를 쓰지 못한 때는 인상 깊게 읽은 책을 소개하거나 일기를 가져온다. 대개 서로의 글을 읽고 "이 문장이 좋았어" 하고 말한 다음 술을 마시고 헤어진다. 중심은 여전히 술이다. 2018년, 2019년에는 낭독회를 열었다. 손님들에게 나눠 줄 리플릿과 책도 만들었다. 올해에는 새로 쓴 시를 실어야겠다고 마음먹었는데 코로나19 덕분에 그 마음이 내년으로 연기됐다. 비록 마음은 연기됐지만, 문식과 상우는 내가 무언가 계속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사람들이다. 그렇-게 막연하진 않지만 내가 웬만큼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아줬으면 좋겠다.


우리의 시 출력물은 8년의 내공답게 정기적으로 비워졌다. 비우기 전까지의 과정은 똑같다. 먼저 책꽂이 한켠에 자리한 출력물을 무시한다. 점점 두툼해져서 지저분해서 못 참겠다 싶을 때 손 닿는 곳에 옮긴다. '그래도 버리기 전에 한 번은 더 읽어봐야지'하고 생각한다. 아니야, 이미 읽었잖아. 안녕.


오늘은 최근 몇 달치 출력물을 비운다. 미안하니까, 비우기 전에 내가 가장 좋아하는 문장을 여기 내려놓는다.


나는 내가 묘하게 촌스러운 줄 았는데
자세하게 촌스러운 것이었다

<믿는 자세1>, 문식


문식은 거리와 사이가 먼 단어들을 짚신 꼬듯 잘 데리고 온다.


나뭇잎 그림자가 비처럼 쏟아지는 나의 정수리
슬픔이 꼭 훌륭할 필요는 없잖아요
버려야 될 빗들을
화병에 꽂아놓고 새로운 방식의 꽃다발을 만들어요

<내일의 신년, 오늘의 베스트>, 변상우


상우는 건들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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