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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씨방 Nov 22. 2020

201120

고등학생 시절 공책 하나, 식단표 품은 습작 공책


오늘의 비움, 또 습작 공책

고등학교 때 나는 내가 다 큰 줄 알았다. 비록 나이는 어리지만 성인보다 어른스러운 취향을 가졌다고 여겼다. 두꺼운 공책 가득 글을 쓰며 '아 나는 세상의 이치를 깨달은 고독한 문학청년이다'라고 생각했다. 학교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시시하고 가소로운 지경에 이르렀으나, 아니 그런 줄 알았으나, 나를 설레게 하는 게 있었다. 



하나는 급식표였다. 고독한 문학청년은 무슨, 영락없는 여고생이잖아. 당시 점심시간 십 분 전부터 엉덩이가 들썩거렸다. 이미 오른발을 문 쪽으로 돌리고 앉아 시계만 바라봤다. 또는 식단표를 꼼꼼히 살피며 무엇이 좋고 싫은지 평가를 하기도 했다. 하트 표시를 보아하니, 반찬투정을 한 날이 하루도 없었구나 싶다. 아마 나처럼 반찬투정 안 하는 친구인 것 같은데, '나두'라고 쓴 이는 누구일지 궁금하다. 점심시간 종이 울리면 내달릴 시간이다. 교실을 나서자마자 식당으로 뜀박질했다. 계단을 두세 개씩 내려가는데, 특히 굽이진 난간을 잡고 빠르게 방향을 틀면 몸이 붕 뜨는 느낌이 들어서 좋았다. 다른 하나는 빙고였다. 참 심심할 때 하는 건데, 자주 심심했는지 꽤 많이 보인다. 빙고의 주제는 같은 반 아이들 이름, 영화 제목, 가수, 연예인, 그리고 대학 이름도 있었다.  


급식표며 빙고판을 보고 있자니 나를 설레게 한 것들이 생각난다. 처음 떡볶이에 밥 비벼 먹는 법을 알려준 분식집, 천 원짜리 와플집, 고구마 모양의 고구미빵, 가끔 복도 창문에 고개를 내밀고 체육복 빌리러 오던 남자애. 잘 설렜네. 지금도 설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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