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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치즈 May 09. 2019

글_05

태은의 속마음

한때는 나도 사랑이 내 삶의 중심이었고 목메어 살던 때가 있었다. 그 당시 내가 지내던 집에서 우리는 거의 같이 살다시피 했고 같이 있지 않을 때도 서로 대화를 주고받는 것도 아니면서 영상통화를 켜놓고 마치 같이 있는 것처럼 일상을 공유했다. 그렇게 서로가 중심이 된 삶을 살다가 그가 먼저 궤도를 이탈했다. 모든 일상을 함께 하는 게 당연하다 보니 내가 그에게 집착하게 된 것이 문제가 되었을까. 우리의 사랑은 커다란 과일바구니 중에 단 하나라도 썩기 시작하면 금세 전부가 썩어버리듯이 서로를 좀먹고 썩어가고 있었다. 더 이상 건강한 사랑이 아니었다.


결국 그가 떠나고 그의 부재에도 온 집안을 가득 메운 그의 흔적 속에서 도저히 나는 숨을 쉴 수도 없어 서둘러 집을 정리하고 이곳으로 떠나왔다. 영원을 약속했던 그 사람도 그렇게 떠나버렸는데 또다시 내게 변치 않음을 약속하는 사람과는 과연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우리는 끝까지 버텨낼 수 있을까. 이러한 생각들 너머로 그에게는 눈길이 그리고 마음이 조금씩 더 가고 있었다. 걷다 보니 어느새 하늘은 천일홍처럼 보랏빛으로 물들고 있었다. 해가 지면서 살짝 쌀쌀해진 날씨를 핑계 삼아 그의 팔에 팔짱을 끼워본다.


영수

태은이 내 팔에 팔짱을 끼웠다. 내 신경이 온통 태은이 서 있는 오른쪽으로 집중되었다. 작은 그녀의 손이 내 팔을 잡았을 뿐인데 무거운 짐을 들은 것처럼 힘이 들어간다. 걷다 보니 그녀의 표정이 살짝 어두워지던데 어디 아프진 않은지 걱정이 된다. 혹시 내가 오늘 그녀를 부담스럽게 하진 않았는지 하루를 되돌아본다.


태은이 좋아하는 식당을 오늘 내게 소개해주었다. 뭘 먹어도 그녀와 먹으니 맛있었겠지만, 그 라자냐는 정말 맛이 있었다. 흘러나오는 노래도 좋았고, 음식을 씹어먹는 그녀의 옆모습을 보는 것도 좋았다. 그녀의 이마에서 코까지 내려오는 선, 작은 입을 오물오물하며 씹는 모습을 보며 하마터면 대화의 흐름과 상관없이 그녀에게 예쁘다고 고백할 뻔했었다. 또 가게 특성상 소곤소곤 이야기해야 해서 우리가 꽤 많이 가까워진 느낌이 들기도 했었다.


내가 알아 온 카페까지 가는 길에 산책로가 있어 우리는 나란히 걸을 기회가 생겼다. 처음 봤을 때 손끝만 잡았던 것이 아쉬웠지만 혹여나 그녀가 불편할까 봐 살짝 가까이 붙어서 걷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우리에게는 오늘만 있는 것이 아니니까. 이런저런 풍경들을 보면서 농담도 주고받았다. 우리는 농담의 코드가 잘 맞았다. 비슷한 농담을 하고 같은 부분에서 웃었다. 한참을 걷다가 어느새 그녀가 말이 없길래 얼굴을 보았더니 태은의 표정이 어딘가 쓸쓸해 보였다. 그래서 나는 또 내가 말실수를 했거나 내가 무례한 농담이라도 한 줄 알고 오늘의 데이트를 망친 느낌이었다. 갑자기 너무 슬퍼져서 나도 밝은 표정을 지을 수가 없어 저물어가는 노을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태은이 살며시 내 팔에 팔짱을 끼워 놀랐지만 당황한 표정을 감추고 옆을 돌아봤더니 그녀가 나를 보고 환하게 웃고 있었다. 그제야 나는 한시름 놓고 태은의 눈을 보며 웃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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