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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치즈 May 13. 2019

글_06

태은의 과거

친구가 지나간 남자는 생각도 하지 않는 거라고 했는데, 오늘처럼 이렇게 행복한 날이면 어김없이 그가 떠오른다. 그 사람도 처음엔 참 다정했었다. 그를 처음 만난 날은 비가 억수같이 많이 오는 날이었다.


나는 중요한 미팅이 있어서 정장 차림에 불편한 구두를 신고 있었고, 양손에는 짐까지 가득했다. 약속 장소 근처 횡단보도에서 신호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갑자기 어떤 부주의한 아저씨가 내 앞을 뛰어가며 날 쳐버렸다. 그러는 바람에 나는 손에 들고 있던 자료들과 가방에 우산까지 떨어트리고 말았다. 되려 그 아저씨는 내 발에 걸려 넘어질 뻔했다며 사과는커녕 호통을 치고 빠르게 사라졌다. 너무 황당했지만, 황급히 떨어진 자료를 주워 손으로 물기를 대충 털어서 가방에 되는대로 집어넣었다. 그사이 나는 내리는 비에 젖을 대로 젖고 있었다. 그때 지나가던 그가 내가 사고를 수습할 때까지 내 우산을 머리 위로 들어주고 있었다. 일어나 그를 마주했을 때엔 눈앞에 손수건이 내밀어져 있었다. “비에 많이 젖었어요.” 걱정하는 눈빛으로 그는 머리를 닦으라며 손수건을 건넸다. “감사합니다. 제가 일단 급한 일이 있어서…. 손수건은 이쪽으로 연락해주세요. 정말 감사합니다!” 나는 그의 빈손에 나의 명함을 쥐여주고는 급하게 미팅 장소로 향했다.


도착하고 보니 아주 물에 빠진 생쥐가 따로 없었고 준비해온 자료도 거의 못쓰게 되어있었다. 미팅 결과는 불 보듯 뻔하게 망치고야 말았다. 미팅이 끝날 때까지도 머리와 옷에 물기가 남아 있어서 속상한 마음도 달랠 겸 근처 카페에 들어가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한잔 시켜서 자리에 털썩 앉았다. 비를 맞아 한기가 돌고 있던 차에 따뜻한 커피를 한 모금을 마시고 나니 꾹 참았던 감정이 북받쳐 올라와 눈물이 흘렀다. 젖어버린 신발을 벗고 보니 아저씨에게 밟힌 오른발이 발갛게 부어올라 있었다. 긴장해서 몰랐던 상처를 눈으로 확인하고 나니 그제야 아픔이 몰려왔다.


“저 아까 그 손수건….” 아픈 발을 보며 멍하게 앉아있는데 누군가 다가와 말을 걸길래 정신을 차리고 쳐다봤더니 아까 횡단보도에서의 은인이었다. 나는 반가운 마음에 벌떡 일어나 인사했다. “아! 아야, 아까는 정말 감사했어요. 손수건은 제가 꼭 새로 사드릴게요.” 갑자기 발을 디뎠더니 아파서 얼굴이 살짝 찡그려졌다. “앉으세요. 손수건은 둘째치고 발도 불편해 보이는데, 근처에 제가 지내는 오피스텔이 있는데 괜찮으시면 가서 옷도 좀 말리시는 게 어때요…? 다른 게 아니라 정말 걱정이 돼서…” 그가 내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얘기했다. 너무 고된 하루 이기도 했고 그의 눈빛이 다정한 게 정말 내가 불쌍해 보여서 꺼낸 얘기인 거 같아서 부축을 받아 그의 집으로 함께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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